알고리즘 밖의 시간

by 김현주

아이를 낳고 펼쳐진 나의 새로운 알고리즘은 매일 나를 낯선 세상으로 데려다주었다. 거실을 서재로 꾸며 미디어 없이 책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 학원 대신 집에서 정교한 몬테소리 교구를 활용하는 엄마, 매일 다채로운 식재료로 예술 같은 이유식을 만드는 엄마들이 내 피드를 가득 채웠다. 화면 너머의 풍경은 그것이 육아의 표준이며, 그렇게 해내는 것이 엄마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정교한 세계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3년 간은 가정 보육을 하겠다는 다짐에 더욱 단단한 빗장을 걸었다. 일찍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엄마들을 향한 세상의 서늘한 시선 또한 내 결심을 부추겼다. 아이를 일찍 기관에 보내면 정서적 유대감이 떨어진다는 말은 나에게 일종의 선고처럼 들렸고, 나는 기어코 부부의 힘으로만 아이를 키워내겠노라 장담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몸을 회복하면서 1년 정도 아이를 돌보면, 그 다음에 남편이 유아휴직을 쓰고 바통을 이어받기로 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육아휴직을 쓴 선배가 전무한 직장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자리가 보존될지를 걱정했다. 결국 상대적으로 복귀가 유연한 계약직 신분이었던 내가 육아를 전담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남편의 직종을 원망했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육아휴직 중인 아빠들은 얼마나 좋은 직장을 다니는 걸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복직의 효율 따져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독박’이라는 말이 ‘육아’라는 말과 붙어버릴 수 밖에 없는 세상. 내 이야기는 아닐 거라 믿었지만 그야말로 나는 ‘독박육아’의 현장에 내던져졌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나의 몫이 된 이후, 나는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것이 나의 ‘능력 부족’을 시인하는 꼴인 것만 같아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알고리즘이 데려다주는 완벽한 풍경에 사로잡혀, 나는 새벽 2시까지 이유식을 만들고 두뇌 발달에 좋다는 교구를 검색하며 강박에 시달렸다. 정작 몸이 지쳐 아이의 눈을 마주하며 웃어주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날들이 반복됐다. 좋은 엄마가 되어 아이를 내 손으로 키워내겠다는 다짐이 단단해질수록, 아이를 향한 나의 다정함은 휘발되어 갔다. 나는 한계치를 향해 달려갔다.


남편은 나에게 어린이집 입소를 제안했다. 망설이는 나를 향해 그는 충분한 적응 기간을 가지면 아이에게도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라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부모님 역시 아이를 맡기고 다시 일로 복귀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넌지시 건네셨다. 나의 상태는 나만 모르고 있었다.


남편이 어린이집 입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꺼낼 때 마다, 역설적이게도 내 마음에는 한줄기 빛이 든 것처럼 숨통이 트였다. 만약 어린이집을 가게 된다면 낮 동안에 나의 시간이 생겼고, 점심 한 끼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3년은 끼고 키우겠노라 공언했던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모유 수유도 실패했는데 가정보육마저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 전, 타인의 잣대에 휘둘리던 내가 다시 보였다. 나는 축축하고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남편의 거듭된 제안에 나는 결국 못 이기는 척 아이의 어린이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단지 내 어린이집에 자리가 났고, 새 학기에 맞춰 입소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며칠은 30분, 그다음은 한 시간, 두 시간. 아이의 적응 시간을 조금씩 늘려갔다. 아이는 헤어질 때 울지도 않고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 나오는 길, 나는 아이에게 빚을 지는 것만 같아 미안했지만 약간의 홀가분함을 느꼈다. 나는 내가 엄마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적응 기간이 끝나고, 아이는 오후 3시 30분에 하원하기 시작했다. 오전 9시 30분에 아이를 보내고 나면 나에게는 오롯이 6시간의 자유가 주어졌다. 아이를 낳은지 14개월만에, 나에게 ‘내 시간’이라는 것이 주어졌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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