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후 우울증인 것 같아요」
책은 곧 제부가 될 동생의 남자 친구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책 제목을 본 동생은 아이를 낳기도 전인 사람에게 너무 성급하게 몰아가는 것 아니냐며 핀잔 섞인 농담을 던졌다. 책과 함께 건넨 카드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언젠가 '축복은 행복의 담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잘 지내시겠지만 엄마라는 무게에 매몰되어 자신을 다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책 한 권 준비해 봤어요. 스토리를 보면 육아 책들은 올라오는데 자신을 돌 볼 책은 못 본 것 같아서요, 분명 좋은 엄마가 되실 테니 걱정 마시고, 건강히 출산하세요.
나는 카드에 쓰여있던 그 메시지를 아파트 단지에 사건이 일어난 그날에 다시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나는 책장을 뒤졌다. 수백 페이지에 육박하는 육아서와 수면 교육, 이유식과 훈육법을 다룬 책들 사이에서 내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채 깊숙이 박혀 있던 그 책을 찾아 꺼냈다.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다. '산후 우울증'이라는 흔해빠진 말이 나만은 비껴갈 것이라 믿었다. 아이를 낳은 것은 나의 선택이고, 그것은 곧 나와 남편의 책임이었으므로 그 무게를 온전히 지는 것 또한 나의 몫이라 여겼다. 나는 아이를 돌보며 집에 있는 동안 종종 숨이 막혔다. 전업주부의 일과에는 끝이라는 게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하는 일은 모두 임무에 가까웠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집,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라는 존재.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숨을 턱 막히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나의 책임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육아라는 것은 단기간에 바짝 실천하는 다이어트도, 야근으로 때워 처리할 수 있는 업무도 아니었다. 아이가 없는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 하나만 건사하면 되던 그 산뜻함을 나는 이제 더 이상 누릴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은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것이 정말 내 인생에 새로운 기쁨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를 보며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내 안에서 행복과 동의어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나는 꽤 자주 힘들었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좌절했다. 아이를 낳은 삶이 불행하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손에 든 책을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책을 넘기는 순간 못된 엄마가 될까 꽁꽁 숨겨놓은 그 진심을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책을 내가 자주 앉는 소파 자리 부근에 올려두고 사흘을 보냈다.
기분이 유난히 가라앉았던 그날, 결국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산후 우울증 초기 단계였다. 책에서는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심리 상담이 가능한 지역별 상담 기관과 서비스, 전화와 채팅 상담 정보가 나와 있었다. 나는 채팅 상담이 가능하다는 사이트에 시간이 날 때마다 들어가 이것저것 살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유명하다는 정신과를, 산후 우울증을 상담해 준다는 지역 상담 기관을 검색했다. 검색창에 띄워진 수많은 상담 센터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위치와 운영시간을 확인하면서도 나는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상담을 받으러 가기 위해서는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했고, 그러기 위해 타인에게 나의 상태를 설명해야 했다. 구구절절 나의 부족함을 늘어놓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릴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 밑바닥을 전시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나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상담을 망설이는 나에게 그는 마음이 내킬 때 언제든 다녀오라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상담을 예약하고, 아이를 맡기고, 시간을 내는 일은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합의로 부모가 되었지만, 변한 것은 나뿐이었다. 남편의 일상은 여전히 출근과 퇴근, 가끔 있는 회식과 일에 따라오는 성과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지는 인간관계로 이루어졌다. 반면 나는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살고 있던 궤도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밀렸다. 남편 역시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견디고 있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은 갈수록 원망의 방향으로 기울었다. 왜 나만 이토록 모든 역할을 도맡아야 하는가. 그 원망은 고심했던 결혼 자체에 대한 후회로까지 번졌다.
아이를 낳는 기쁨이, 둘에서 셋이 되었다는 숭고함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꾸렸다는 그 벅참이, 곧 행복으로 되돌아올 거라는 내 생각은 산산조각 났다. 축복은 행복을 담보하지 않았다.
나는 상담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아이가 아닌 나를 위해 산책을 나갔다. 아이와 온몸으로 놀아주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는 대신 문화센터에 등록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방문 선생님을 모셨다. 선생님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멀찍이서 아이를 지켜보며 웃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30분이라는 시간에 숨을 쉬었다.
아이를 낳고 결심했었다. 3년 동안은 기관에 보내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키우겠다고. 그 결심을 내려놓고 나는 어린이집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가 14개월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