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맡겨진 밤

by 김현주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산후 도우미를 2주간 썼다. 도우미 분이 계시는 낮 시간은 긴장의 끈이 잠시 느슨해지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전문가의 손길 아래 아기는 순한 양처럼 잠들었고, 나는 그 틈을 타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오후 6시, 도우미 분이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집안의 공기는 달라졌다. 나는 다시 긴장 상태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이 작고 연약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건 오직 나와 곧 퇴근할 남편뿐이었다.


밤은 길었다. 아기는 두 시간 간격으로 깨서 울었고, 나는 몸을 일으켜 기저귀를 갈고 젖병을 물렸다. 품 안의 아기를 바라보며 세상이 말하는 '형언할 수 없는 모성애'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나는 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무사히 새벽을 보내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아이가 숨은 잘 쉬고 있는지, 열은 없는지, 자다가 혹여 이불이 얼굴을 덮지는 않았는지, 엎드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확인했다. 아기가 잠들어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작은 뒤척임 소리에도 다시 눈이 떠졌다. 혹시 숨이 멈춘 건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아기의 코 가까이에 손을 가져다 대 보기도 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남편을 굳이 깨우지는 않았다. 나는 희미한 노란색 조명을 곁에 두고 누워있는 아기를 보며 보초를 섰다. 그렇게 새벽을 보내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일어나 남편의 출근을 배웅했다. 그리고 도우미 분이 어서 와주시기를, 나는 그렇게 매일 오전 9시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남편과 애초에 약속했던 계획은 명확했다. 내가 1년 정도 몸을 추스른 뒤 복직하면, 살림과 육아에 자신감을 보였던 남편이 육아휴직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9년 동안 쉼 없이 일해온 나에게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자아의 꽤 큰 부분을 차지했고, 남편 역시 그 사실을 존중했다. 나는 제왕절개 수술 2주 전까지 출근을 했다. 맡았던 일을 정리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행히 임신기간 내내 건강상의 문제는 없었고, 나는 끝까지 맡은 일을 마무리하고 휴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임신을 이유로 내 업무를 남에게 떠넘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나를 홀가분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이를 낳은 뒤에도 다시 일로 복귀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 믿었다. 출근 마지막 날, 남편은 내 직장으로 꽃바구니를 보냈다. 꽃바구니 리본에는 ‘9년 동안 수고했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코로나 시기에 한 결혼, 취소 되어버린 신혼여행. 나로서는 일을 시작하고 가장 길게 쉬는 휴가였다. 머지않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겠다고, 나는 짐을 챙겨나오며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아기와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중압감이 나를 눌렀다. 남편은 분명 성실한 아빠였지만, 아기의 미세한 울음소리를 구분하거나 불편함을 바로 알아차릴 만큼 섬세하지는 못했고, 출퇴근을 하는 상황에서 아이의 주양육자가 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산후조리원에서부터 시도한 모유 수유가 끝내 100일도 채우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간 일은 부채감처럼 남아 나를 더 짓눌렀다. 아이에게 모유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말, 모유 수유를 원했다면 진작에 병원에서부터 젖을 물렸어야 했다는 조언, 혼합 수유를 하겠다고 쉽게 말한 나의 무지까지 겹겹이 쌓여 떠올랐다. 나는 ‘엄마’로서 제대로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자주 붙잡혔다. 모유수유도 해내지 못했으니, 그 나머지라도 엄마가 채워주어야 한다는, 그래서 일보다는 육아가 지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자연스럽게 흘러넘친 모성애라기 보다는 엄마로서 해야 할 임무, 지독한 책임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나는 결국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을 더 쉬기로 했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대로, 내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지 못해 내린 선택이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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