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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 한 방울

희姬스토리

by 나철여

기억도 가물하다.
네모난 잉크병에 펜촉이 닿을 듯 말 듯 가라앉은 잉크를 찍어내느라 잉크병을 기울이던 그때부터 기억의 시작점이다.

소녀는
독일제 만년필 하나 갖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에 여대생이 되었고, 졸업 후 첫 월급으로 원피스 한벌과 만년필을 장만했다.

소녀는 결혼이 절실했다.
도둑소굴 같은 집에서 빠져나갈 궁리 끝에 궁여지책이, 빠른 결혼이었다.

일곱 살 나이차이, 홀어머니에 독자, 법대를 나와 고시의 쓴 물만 마신 노총각 등등 이런저런 타이틀이 붙은 신랑감이랑 맞선을 보기로 했다. 큰 키에 멜랑꼴리하고 솔리터리 한 그가 감색 트렌치코트를 팔에 걸치고 나타났다. 첫눈에 반했다. 도피? 도박? 다 아니다. 사랑에 빠졌다.

소녀의 부모는 결혼반대였고

소녀는 반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난생처음 목숨 건 반항으로 방문까지 걸어 잠갔다.


단식 투쟁이 끝났다.

"그래 사랑 처먹고 살아라"
무지막지한 엄마의 딸사랑 방식이었다.

둘은

길지 않은 교제 중 둘만의 약혼식을 하기로 했다.
벚꽃이 만개한 봄철이었다. 벚꽃보다 더 진한 서로의 체취에 빠져 벤치에 포개 앉았다.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지나 둘은 지금 가장 아끼는 것 하나씩 꺼내기로 했다.
서로 결혼의 약속으로 꺼낸 소중한 게 바로 똑같은 독일제 만년필이었다.

소녀는 똑같은 만년필에

환경차 세대차 성격차 등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천생베필'이라며 모든 걸 걸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소녀는 장모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었다.
사랑도 낡았고 시큼털털한 인생 내음에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서야 알았다.

'사랑은 처먹는 게 아니라 빨아먹는 거라는 걸'

이제 소녀는 닳고 닳아 막대기만 남은 막대사탕을 손가락 끝에 겨우 잡고 있다.

그리고 소녀는,
펜 끝에 남은 한 방울 잉크가 영원히 마르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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