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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Feb 21. 2022

기발하고, 파격적인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그 시절 많은 시간을 대형서점에서 배회했습니다.


종로와 교보, 영풍과 을지, 신촌의 홍익, 집 가까운 천호동에 새로 생긴 교민... 서점에 들를 때마다 지나치지 못했던 코너가 바로 ‘시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80년대는 문화의 시대이자 팝의 시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시(詩)의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김정환(지울 수 없는 노래)과 박노해(노동의 새벽) 같은 운동권 시인들. 박남철(지상의 인간)과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파격과 실험. 첫 시집을 유고 시집으로 낸 기형도(입속의 검은 잎)의 안타까운 허무. 하재봉(안개와 불)이 그려낸 신화적 상상력과 시운동 동인들의 신선함. 먼 훗날 세계적 권위의 그리핀시문학상을 수상한 김혜순(어느 별의 지옥)이 그때 풍겼던 괴이한 죽음의 향기...


그외애도 많은 시인들과 그들의 시집이 떠오릅니다. 시집 한 권에 2,000원 남짓 시절로 기억됩니다. 세운상가 해적판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 몇 개, 그리고 한두 권 새로 산 시집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지요.


인사동 카페 '시인학교'도 그즈음 자주 가던 곳입니다. '평화 만들기'와 '귀천'도 기억나네요. 운 좋으면 시를 읽다가 그 시집의 저자를 직접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고들 했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낮이나 밤이나 어둑어둑했던 카페에서의 진한 커피 곁들인 시 감상은 맛이 아니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80년대는 진정, 축복받은 시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시에 심취했던 청년들을 가장 전율케 했던 시집을 단 한권만 꼽는다면? 주저함 없이 단언합니다. 당연히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젊은날  ‘조금은 삐딱했던’ 청춘들이라면 많이들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싯구절 하나만 읊조려 보겠습니다.


     내 이름은 스물두 살

     한 이십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꽃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 (중략) ......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장정일 시 <지하인간> 중에서


시인 장정일. 중졸 학력과 소년원 경력의 프로필은 특이합니다. 하지만 더욱 빛나는 것은 엄청난 독서량에서 나온 ‘백과사전적’ 지식과 순탄치 않았을 인생이 빚어낸 기발하고 대담하고 파격적인 시어들.  그리고 패기찬 상상력은 그를 ‘시의 80년대’를 상징하는 대표 시인으로 기억하게 합니다.


그의 평범치 않았던 삶의 궤적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었지요. 한마디로 괴물 같았던 시인. 아무튼 그에 대한 저의 기억은 그러합니다.

  

몇 년전, 경향신문 의뢰로 ‘인생의 책’을 고르던 저는 꼭 시집 한 권을 넣고 싶었고, 의외로 쉽게 결정돠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시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시인 역시 시보다는 소설이니 서평집이니 다른 활동에 더 열심이었던 것 같더군요.


묘한 우연이었을까요.  제가 그를 잊었던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오랜 시간 시집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던 중, 그가 물경 28년 만에 새 시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 구매를 클릭하려다 순간 멈췄습니다. 그래서 그 글은 이렇게 마무리됐습니다.

"내일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서점을 찾을 예정입니다. 시인 장정일을, 만나기 위해, 다시 그곳에서."


다음날 저는, 약속대로 코엑스 영풍문고를 찾아 장정일 신작 시집 <눈 속의 구조대>를 샀습니다. (얼마만의 서점에서의 시집 구입이었는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단숨에 읽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독후감을 적지는 않겠습니다.


스물두   이미 '삶의 부질없음' 뇌까렸던 시인 장정일, 다만 그가 앞으로도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작업을 계속할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해요, 말해 봐요.

     마지막이 없어질 때까지

     당신이 얼마나 많은 마지막을 만들었는지.

     - 장정일 시 <당신 홀로 옥상에서> 중에서



경향신문에 실린 <내 인생의 책> 원고를 조금 수정 보완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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