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으로 유명한 철학자인 그는 여타 철학자가 그렇듯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칸트는 완벽주의적이다 못해 강박적이라고 추측할 정도로 시간을 엄수하며 규칙적인 것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는 본인이 그렇듯 자신의 집사에게도 매일 똑같은 옷을 입게 했다. 덕분에 10년 동안 똑같은 옷을 입었던 그의 집사가 단 하루 일탈 삼아 다른 옷을 입자 그걸 본 칸트가 기절할 뻔했다는 일화는 그의 독특함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칸트만큼은 아니겠지만 누구에게나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는 존재할 것이다.
나 역시 고백하자면 불확실성에 대한 커다란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불안을 썩 달갑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은 우리를 미리 준비시켜 주는 일종의 백신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에게 백신을 권하는 의사는 없듯이,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치의가 되어 본인의 마음을 관조하며 필요한 만큼만 이 불안을 되새겨야 한다.
이런 관점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익숙할 수 있다. 이는 고통이 곧 발전의 기회라는 니체의 철학과 연결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니체의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그에 대한 해설은 피하고 싶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나보다 설명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 트럭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이 당신만의 해법을 찾기를 바란다. 니체도 그것을 원했을 것이다.
아까 위에서 한 백신 비유를 보며, '관조하면서 알아서 적당히 조절하라니, 정말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소리 아닌가'라 느꼈다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당신이 내가 될 수 없듯이, 나는 당신이 될 수가 없다. 애석하게도, 우린 타인의 생각을 읽는 초능력 따위는 없다. 아니, 설령 읽을 수 있다 한들 우린 결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각자 겪은 경험이 상이한데 동일한 해법을 적용시키려는 것은 본질적으로 미완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철학이어도 본인의 기준으로 걸러 듣길 바란다.
무리수를 감추려 했던 피타고라스 학파, 무리수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살인도 불사했다는 소문은 의문에 부쳐져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공감된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실수(real number)의 범위 내에서 무작위 하게 숫자를 고른다면 그것은 굉장히, 그것도 매우 굉장히 1과 가까운 확률로 무리수일 것이다. 아니, 사실상 유리수가 나올 확률은 0이라고 해도 좋다. 즉 그 소리는 우주의 대부분을 이루는 숫자들(예: 좌표계)은 실제로는 다음 소수점자리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그러한 불쾌한 수들로 가득 차 있다는 소리다. 더더욱 불쾌한 사실은 그런 불합리함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합리적인 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 초등학교 때 무리수를 처음 접할 당시만 해도 그리 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문제집에서 무리수가 무리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수점 아래 몇 자리들이 순환하지 않는 것만을 보여줬기에 거기에 의구심을 가진 게 시작인 것 같다. 그것을 보며 나는 무심코 더더욱 빨라질 컴퓨터를 이용하면 언젠가는 순환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심증이 생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럴 것이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믿음은 헛된 것이었다. 해석학 수업에서 무리수가 왜 무리수로 불리는지 깨닫고, 양자역학, 괴델의 불완전성 법칙, 엔트로피 역학 등 불확실함이야 말로 인간 지성이 도달한 극한의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내가 컴퓨터 과학과 수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런 불확실성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실험 과학에 흥미를 잃은 것도 같은 이유다. 예를 들어, 고무줄로 돌을 발사하는 실험을 떠올려보자. 고무줄을 튕길 때 발생하는 장력은 발사대를 흔들리게 하고, 아무리 동일한 힘으로 당기려 해도 약간의 차이가 생긴다. 3차원 기준의 각도도 오차가 없다고 할 수 없고, 측정조차도 눈대중으로 130.33cm 일지 130.32cm 일지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애매한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역설적으로 이후 나는 그런 불확실함 때문에 꺼림칙해했던 통계학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이론 통계학은 결코 불완전하지 않았다. 주먹구구식으로 하던 것 같은 많은 통계적 기술은 굉장히 단단한 논리와 합리로 무장되어 있다. 나는 이제 측정을 하며 130.33cm 일지 130.32cm 일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함을 뽑아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이러한 불완전함에 대한 논의는 위에 말한 불완전함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백신 예시는 애초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관한 비유였으니까. 다만 이러한 나의 불완전함에 대한 관점 변화를 인지함으로 인해 나의 마음의 면역력이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