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에 뛰어드는 것도 투쟁에서 벗어나는 것도 결국 '나'의 선택이다
지난 포스팅에서는 오래전에 개봉한 영화(Tootise, 1982) 속의 색 분석을 하였다면 이번에는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영화를 통해서 빨간색 분석을 해보겠다.
2000년대에 넘어와서도 영화 속의 색 사용은 여전하다. 2000년대 이전의 영화들은 직접적인 색 사용을 했었더라면, 2000년도를 넘어와서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색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번에 분석할 영화는 <캐롤>. 연출을 함께 접목하여 색깔을 사용한 영화의 좋은 예시들 중 하나다.
<캐롤>의 간략한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이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참고로 이 영화는 1950년도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때는 아직까지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분류하던 시기였음을 알고 보는 것이 전반적으로 영화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듯하다.
내용 스포 주의 결말 다 나옴
1950년대 뉴욕 맨해튼, 연말 세일 기간으로 빨간색과 초록색 크리스마스 장식이 잔뜩 꾸며진 백화점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곳 인형과 장난감 코너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테레즈.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산타클로스 빨간 모자를 모든 직원들에게 배부하는데 테레즈는 유독 그 모자를 쓰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모자를 쓰라는 매니저의 주의에 테레즈는 할 수 없이 모자를 쓴다.
빨간색 산타클로스 모자를 쓴 뒤에 무심코 그녀가 던진 시선의 끝에는,
연말 선물을 사러 구경을 나온, 빨간색 옷차림의 캐롤이 서 있다.
테레즈에게 다가간 캐롤은 자신의 딸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테레즈는 그녀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난감을 추천해준다.
집으로 바로 배송된다는 테레즈의 말에 그 자리에서 바로 장난감을 구매한 캐롤은 장난감을 배송받을 자신의 집 주소를 적고 테레즈에게 건넨다.
그리고 캐롤이 떠난 자리에는 그녀가 주소를 쓰느라 잠시 빼두었던 장갑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캐롤을 만났을 때부터 계속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에 사로 잡혀 있던 테레즈.
캐롤이 깜빡하고 두고 간 장갑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한다.
캐롤이 적어두고 간 주소를 알고 있는 이상, 그녀의 장갑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상황. 결국 테레즈는 캐롤의 집으로 그녀의 장갑을 보내준다.
여기서 퀴즈.
테레즈를 상징하는 색깔은 과연 무엇일까? 힌트를 주자면 테레즈와 캐롤의 상징 색은 이 영화의 제목과 매우 밀접해 있다.
정답은 초록색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왔던 장면들을 다시 돌이켜보자.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테레즈는 초록색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캐롤의 장갑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의 락커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의 주변에는 초록색 빛이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 이후 택배로 캐롤의 집에 장갑을 보내 줄 때의 택배 자동차 색은 여기 화면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역시 초록색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같은 색깔을 보여줌으로써 테레즈의 상징색은 초록색이라는 것을 감독은 관객들에게 각인시켜준다.
반면, 캐롤을 상징하는 색깔은 빨간색이다.
테레즈가 쓰기 싫어하던 빨간색 모자는 캐롤의 등장을 암시한다.
매일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일상 속을 살아가던 테레즈. 그녀가 행사 때문에 빨간색 모자를 쓰고 나니 빨간 옷차림의 캐롤이 나타난다.
이때 테레즈의 시선에 걸린 캐롤은 테레즈가 일하는 매장과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을 분리해주는 울타리 앞에 서 있다.
울타리 색을 자세히 보면 테레즈를 상징하는 초록색이며 이는 캐롤이 테레즈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음을 뜻한다.
빨간색 모자에, 빨간색 머플러, 그리고 주소지를 건넬 때 보이는 빨간색 매니큐어. 캐롤을 둘러싼 빨간색들은 그녀의 상징 색이 빨간색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다 못해 '빨간색은 캐롤의 색이야!'라고 외치고 있다.
그 외에도 극 초반에서부터 캐롤과 테레즈의 만남을 암시하는 장치들은 여기저기 설치되어있다.
'캐롤' 하면 떠오르는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빨간색과 초록색.
그리고 연말 세일 기간에 백화점 내부를 꾸민 수많은 크리스마스 장식들.
심지어 엘리베이터 등 색은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나뉘어 있다.
장갑을 보내준 테레즈에게 감사의 표시로 캐롤이 점심을 대접한 이후, 둘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 잡히게 된다.
남편 지인 파티장에 따라온 캐롤은 파티가 전혀 즐겁지 않은지, 고독해 보이는 얼굴로 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지인이 다가와서 말을 걸면 살갑게 대꾸해주지만
연말을 함께 보내자는 지인의 제안에 거절하며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편 캐롤에 대한 싱숭생숭한 마음 때문에 테레즈는 자신의 이성 친구에게 고민 상담을 한다.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두 씬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화면 속 '틀'을 이용한 둘의 마음이다.
영화의 표현 형식 중 하나로 보는 대상을 선택하고 보는 방식을 통제함으로써 하나의 시각이나 특정한 관점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프레임(frame), 혹은 프레이밍(framing)이라 부른다.
프레임은 열린 형식(open frame)과 닫힌 형식(closed frame), 두 가지로 나뉜다. 열린 형식 속의 인물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세상에 있음으로써 제한되지 않은 환경을 보여주고 닫힌 형식 속의 인물은 외부와 내부에서 압박하는 힘으로 인해 억압되어 있는 인물의 심리를 보여준다.
<캐롤> 속의 캐롤과 테레즈는 둘 다 닫혀 있는 프레임 안에 있다.
먼저 캐롤의 마음의 틀을 보자. 그녀는 파티장에 홀로 있다.
이때 화면을 보면 캐롤과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둘을 갈라놓는 틀이 존재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창문틀이다. 이는 육체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캐롤과 심적으로 그들을 밀어내는 그녀의 닫힌 마음이라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롤의 지인이 그녀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와 친밀감을 쌓으려는 비언어적 행위다.
살갑게 대꾸해주는 그녀의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지인을 자신의 마음속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듯, 다른 칸으로 슬쩍 넘어간다.
이렇게 또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에게 마음의 벽을 세운 캐롤.
이제 테레즈의 마음의 벽을 살펴보자. 이 장면에서는 우린 세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우선 테레즈를 상징하는 초록색 배경이 보인다.
그 초록색 벽지를 배경으로 감옥 창살처럼 여러 개 설치된 틀이 보인다. 이것은 테레즈의 복잡한 속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감옥에 갇힌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강조된 굵은 검은색 틀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성 친구로부터 닫혀 있는 테레즈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또한 자신의 마음 때문에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테레즈의 심경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 이후, 서로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부정하지 못하고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
하지만 캐롤의 남편, 하지가 나타나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캐롤은 자신의 차로 테레즈를 바래다준다.
그리고 맞은 편의 차의 헤드라이트가 둘을 비추고 지나간다.
이때 보이는 자동차 창문틀. 둘은 함께 있지만 마음은 서로로부터 격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고 우여곡절 끝에 둘은 여행을 떠난다. 행복도 잠시, 캐롤의 남편, 하지가 보낸 사람에 의해 둘에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큰 시련이 닥친다.
캐롤과 테레즈의 옆 방 벽에 도청 장치를 달아서 둘이 친구 이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만한 대화 내용을 녹음한 것이었다. 캐롤은 총을 겨누며 테이프를 내놓으라고 하지만 하지가 보낸 남자는 이미 테이프를 하지에게 다 보내버렸다며 얄미우리만큼 여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결국 또 다시 둘은 살벌한 얼음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비슷한 촬영 구도가 연출된다. 이 두 화면에서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벽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둘이 같은 틀 안에 있다.
그리고 화면은 둘의 정면 모습을 또 한 번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각도에서는 둘 사이에 틀이 존재한다.
꾸역꾸역 울음을 삼켜내던 테레즈가 결국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캐롤이 테레즈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둘은 하나의 틀 안에 갇히게 된 모습을 보여준다.
둘 사이를 가르고 있던 창문틀과 칙칙하고 어두운 내부가 둘의 이별을 암시했지만
캐롤이 테레즈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달래줌으로써
당장 이 둘이 헤어지게 되더라도 이 영화 끝에선 둘은 다시 함께 할 것임을 영화는 관객들에게 암시한다.
캐롤의 딸, 린다의 양육권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남편 때문에 헤어지게 된 캐롤과 테레즈.
담담히 이별을 받아들인 테레즈는 여행 갔을 때 찍었던 캐롤의 사진을 인화한다.
캐롤의 사진을 보며 그녀를 그리워하는 테레즈의 모습. 그녀를 둘러싼 붉은빛이 테레즈가 캐롤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캐롤에게 전화를 거는 테레즈.
전화를 받은 캐롤의 주변에도 초록색 불빛이 퍼져있다.
테레즈를 그리워하지만 린다를 포기할 수 없는 캐롤은 전화를 끊는다.
이때 캐롤의 손톱 주목. 항상 빨갛게 칠하고 다니던 그녀의 빨간색 매니큐어가 지워져 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모든 지향성과 욕망을 지웠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하지만 점점 곪아가는 자신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는 캐롤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말한다.
린다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심지어 감옥에 가는 것까지.
하지만 날 부정하며 산다면 린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이 대목에서 캐롤에게 있어서 빨간색 매니큐어는 그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매니큐어를 지운 행위의 뜻은 그녀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살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캐롤은 떠난다.
시간이 흘러서 다시 재회를 하게 된 두 사람.
혼란스러웠던 마음도 잠시, 마음이 있으면 약속 장소로 와달라는 캐롤의 말에 테레즈는 그녀를 보러 간다.
재회를 하는 두 사람은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서로를 얼싸안으며 극적인 행복을 보여주지 않는다. 서로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반짝이고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있지만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둘의 요동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극적인 상황임에도 고요하게 절제된 얼굴, 감독은 감격적인 상황에서 두 인물의 감정을 정적으로 다스림으로써 둘의 감정을 더 크게 승화시켰다. LS(Long Shot)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모습은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화면이 MS(Medium Shot)까지 가는데 두 사람의 모습이 MCU(Medium Close-Up)까지 잡힐 때는 갑자기 화면이 어둡게 변환하며 영화를 끝낸다.
보는 이들을 하여금 긴장을 계속해서 쌓아가다가 화면이 검은색으로 변할 때 긴장을 탁 놓게 만드는 세련된 기법이었다.
<캐롤>을 통해 색깔과 화면의 틀을 이용한 연출법을 씬 바이 씬으로 분석하면서 토드 헤인즈 감독은 그가 관객들에게 인물들의 심리와 외부/내부적 압박에 있음을 비언어적으로 알려주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그가 단순히 색깔과 틀을 연구했을 뿐만이 아니라 고조되는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화면 컷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 까지 분석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진 출처: 유튜브에서 구매한 영화(캐롤)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