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이 있던 자리

by 오설자

교실마다 풍금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풍금에는 하얀 레이스 커버가 덮여 있었고, 꽃병에는 수선화가 꽂혀 있기도 했다. 아침 햇살에 창가에 있던 풍금이 먼저 빛났고, 저녁노을이 풍금 위에 머물렀다. 세월에 밀려 사라진 풍금이지만 나에겐 아직도 추억으로 남아있다.


교생실습 때. 6학년 음악수업으로 가르칠 노래는 ‘과꽃’이었다. 열심히 준비했기에 자신 있게 전주를 연주했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풍금 소리와 노랫소리가 어울리는 것이 대견하여 고개를 들었다가 일순 음을 놓치고 말았다. 음표들이 화르르 날아가 버리고 희뿌연 구름이 눈앞을 가렸다. 다리가 떨리고 온몸에 진땀이 났다. 사태를 알아차린 아이들은 어설픈 교생의 ‘이상한 반주’에 맞추어 ‘제대로’ 노래를 불러주었고. 그렇게 수업을 마쳤다.
지도교사가 내 수업은 아주 ‘차분했으며’ 마무리를 잘 했다고 평을 해 주셨다. 나를 구제해 준 멋진 강평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얼굴에 스치는 나를 향한 연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발령을 받고 나서 진짜 음악수업을 하게 되었다. 과꽃만 가르쳤던 실습과는 달랐다. 빠르고 경쾌한 노래를 가르칠 때는 건반을 누르는 일보다 발을 구르는 횟수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음악시간이 괴로웠다. 연습은 안 하고 풍금 탓만 했다. 풍금은 내 눈초리에도 아랑곳없이 언젠가 자신을 잘 다뤄줄 것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 학교 교무 선생님은 영화배우 뺨치는 멋진 신사였다. 방과 후면 풍금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선배 언니와 나도 그 교실에 가서 같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청하면 악보도 없이 즉석에서 반주를 하는 것이 부럽기만 했다.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늦도록 풍금을 치는 모습이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풍금 치는 사랑손님’처럼. 그렇게 근사한 노래를 연주할 수 있는 주인을 만난 풍금은 행운이었다. 한쪽으로 치워진 풍금을 볼 때마다 미안해졌다.
이듬해에 피아노가 있는 교실에 배정을 받았다. 마음껏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주말 일직 때면 그이를 교실로 불러 노래를 부르고 내가 좋아하던 ‘은파’를 더듬더듬 쳐 주기도 했다. 피아노에 마음을 빼앗겨 풍금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해에는 다시 풍금이 있는 교실에 배정되었다. 학교에 피아노가 한 대뿐이라 연이어 쓸 수 없었다. 풍금을 한쪽으로 치워놓았다가 음악시간에만 마지못해 뚜껑을 열었다. 건반이 많이 상한 풍금은 치열이 제멋대로인 못난이를 보는 것 같았다. 소리도 잘 나지 않고 발판도 뻑뻑하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풍금에 익숙해졌다. 노래를 가르치다가 화음을 넣어 부르는 아이들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서로 마음이 오가는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아이들의 목소리에 맞추어 연주를 하면서 가슴이 싸 해지곤 했다. 수업을 마치면 손가락 끝에 눌렸다가 올라오는 건반의 통통한 힘이 남아 있었다. 교실을 가득 울리는 풍금 소리가 가슴에 고이기 시작했다.


세월은 흐르고 음악 전담교사가 배정되었고 나는 더 이상 음악수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피아노가 있는 음악실에서 수업을 하는 학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음악 전담교사들은 전자오르간이나 교육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음악파일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대형 모니터에 뜬 악보에 움직이는 빨간 음표를 따라 노래를 부르면 되었다. 디지털 음은 풍금의 고아한 멋을 결코 내지 못했다. 풍금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살렸지만, 디지털 음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기계 속에 묻어버렸다.

교실이 비품이던 풍금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교실 한쪽으로 밀려나 아이들의 작품을 올려놓거나, 물건 받침대로 쓰기도 하고, 바닥 귀퉁이 구멍을 가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급기야 교실에 있는 풍금을 모두 복도로 내놓으라는 징집 방송에, 풍금은 전쟁터에 끌려가는 병사처럼 덮개도 없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한동안 복도에 버려졌다. 그리고 어느 날 어디론가 실려가고 말았다.


몇 년 전, 스페인에 갔을 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성당 안에 퍼지는 파이프오르간 소리는 신의 목소리 같았다. 심장을 울리는 성스러운 소리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때, 오래전 내가 애쓰며 냈던 풍금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하였다. 하얀 블라우스에 풍성한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풍금을 연주하며 아이들과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던 그 시절. 작은 교실의 풍금 소리가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뒤섞여 아련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며 바람이 쉭쉭 빠지던 풍금 소리. ‘이-일송정 푸른 솔은~’ 이거나 ‘울 밑에선 봉선화야~’하고 교무 선생님이 풍금을 치면서 부르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분은 풍금을 치면서 상처한 아픔을 달랬는지도 몰랐다.
‘작별’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도 나도 울컥했던 일도 떠올랐다. 풍금 소리는 헤어지는 슬픔을 더 깊게 만들었다. 고요한 학교에 풍금 소리가 퍼지면 지붕 위를 날아다니던 비둘기들도 소리 맞춰 반주를 넣곤 했다.

삼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도 많이 변했다. 노란 칠이 벗겨진 풍금처럼. 나도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가 온 것 같다. 세월 따라 변하고, 잊히고, 결국 사라지지만, 어떤 것들은 추억을 남겨 놓는다.


조용한 교실에 앉아 있으면 나도 몰래 눈길이 갈 때가 있다.
‘그땐, 저기에 풍금이 있었지’
친했던 동료가 떠나버린 듯 빈자리에 시선이 머문다.

내 청춘의 그림자가 고여 있는 곳. 풍금이 떠난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