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속에서

비오는 날 생각

by 오설자

물 폭탄이 따로 없다. 잠깐 나갔다가 빗속에 잠겼다. 우산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좋아하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 정지된 화면 같은 사방에 빗줄기만 가득하다. 비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이런 비, 기억난다.



어느 오후, 산책이나 하고 오자며 나섰다. 한바탕 요란하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기는 했지만, 검은 구름이 빠르게 뭉치며 소나기가 또 쏟아질 기세였다. 우리는 커다란 아베끄 우산을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짐을 들기 싫어하는 남편은 나더러 그것을 들라고 한다.


“당신이 들어야 멋있어. 큰 칼 찬 것 같이 어울리는데?”


남편은 마지못해 우산을 들었고 나는 작은 손가방을 달랑 매고 한들한들 따라갔다. 비가 쓸어내린 길은 물걸레로 닦은 것만큼이나 반짝였고 나뭇잎들은 저마다 맑은 색이 선명했다.


두터운 구름 뒤로 아직 해가 남아 있었는지 하늘은 군데군데 노을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 시간에 산책하는 것이 참 좋다. 소리 없이 어스름을 데리고 오는 공기는 대낮의 강렬했던 기운을 살짝 숨죽여 편안하게 해 준다. 노을이 번지다 차츰 사라지는 따뜻한 기운도 좋다. 부드러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것은 더 좋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이 빗속을 둘이 걸어요~ 아무도 없는 여기서 저 세상 끝까지 ~”


한강 둔치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천둥이 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곧 그칠 소나기려니 했다. 비는 점점 거세졌고 퍼부었다. 제법 큰 우산이었는데도 빗물이 마구 들이쳤다. 그이 옆에 찰싹 붙었다. 더운 기운이 훅 올라왔다.

연애할 때. 나는 비 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고 걷는 것을 좋아했다. 걸으며 끝없이 이야기를 했다. 주로 내가 떠들었고 그는 가만히 듣다가 결론을 내려주곤 했다. 그의 팔짱을 끼고 걸으면 따뜻함이 내게로 건너와 나를 데워주었다. 이대로 이 남자와 결혼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결혼하면 나는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넓은 플리츠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아이들을 앞세우고 나들이를 가고 싶었다. 기다란 바게트 빵과 포도와 사과를 넣은 멋들어진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나무 그늘에 두꺼운 천으로 자리를 깔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나란히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일이었다. 풀벌레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남편과 미소를 지을 것이다.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처럼. 그런 낙낙한 날들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상상하던 ‘피크닉’은 과자를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반바지 차림으로 돗자리에 앉아 김밥을 먹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도 하루살이 무리들을 따라 뛰어다니는 어린것들을 보고 많이 웃었다. 나무 그늘에서 책을 몇 번 읽어주기도 전에 아이들은 다 커버렸고.

비가 더 거세지고 천둥벼락이 쉴 새 없이 내리쳤다. 하늘이 쪼개지듯 진동했다. 강 건너 빌딩 숲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뿌연 빗줄기만 강물과 맞닿아 있었다. 빗물이 일으키는 물안개와 강과 우리뿐이었다. 폭포 앞에 서 있는 듯 세찬 빗줄기에 우리는 섬처럼 갇혔다.


흩뿌리는 비를 피하려 우리는 꼭 붙었다. 어깨에 얹어진 남편의 손이 따뜻했다. 둘이 한 우산을 쓰고 걸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어깨를 맞대고 걸으니 행진하는 군인처럼 발도 척척 들어맞았다. 웅얼거리는 그의 노랫소리가 귓불을 간지럽혔다. 옷은 이미 흠뻑 젖고 등으로 빗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이 순간이 오래갔으면 했다.

잊어버린 소소한 기쁨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처럼 머리를 감겨 주거나, 늦게 온 남편의 발을 씻겨 주거나, 식당에서 나올 때 신발을 나란히 놓아주거나. 무료한 낮에 무릎에 뉘어 귀지를 파주거나, 발톱을 깎아 주거나. 입술에 묻은 음식을 휴지로 닦아주거나. 그런 것들은 드라마에서나 보는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힘들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지면서 당연하게 여겨지고 가슴 설렘이나 두근거림이 묻히고 잊혔다. 작은 배려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살았다.


행복은 그게 우산 크기만 한 것일지라도 아주 오래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잔잔한 기쁨이 인생의 마디마디를 단단하게 연결하여 삶 전체를 소나기 그친 밤하늘에 뜬 별들처럼 반짝이게 물들인다는 것을. 우산 속에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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