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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

모멀꼿 필 무렵

by 오설자

제주에는 일 년에 두 번 ‘달밤에 소금을 뿌린 풍경’이 펼쳐진다. 모멀꼿(메밀꽃) 핀 굴렁진 밭은 이국적인 하얀 언덕을 만든다.


모멀(메밀)은 척박한 땅에 자라는 가난한 곡식이다. 다른 농사가 잘 안 되는 곳에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작물이다. 제주 설화에 자청비 여신이 모멀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의 농경신 데메테르에 비기는 자청비는 왈가닥인 농업의 여신이다. 풍년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농신農神을 대접하는 행위로 밭에서 일하다 점심을 먹기 전에 조금 떠서 “코시래!” 하며 밭으로 던지곤 했다.


단백질과 라이신 필수아미노산의 함량이 높으며 플라보노이드류의 항산화 물질인 루틴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모멀은 지금은 웰빙 음식으로 가치를 높이고 있다. 빙떡, 몸국, 둘레떡, 모멀조배기 등은 제주 모멀이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모멀을 털어낸 후 거피하면 모멀쌀이 된다. 모멀껍질은 잘 말려 베갯속으로 쓴다. 베개를 베고 누워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과 함께 사르륵사르륵 나는 소리는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듣는 듯 편안하고 달콤한 잠으로 빠져들게 한다.


모멀쌀을 물에 치대어 즙을 내고 타지 않게 저으면서 탱글하게 뭉쳐질 때까지 한 시간 넘게 끓이고 너른 양푼에 부어 식히면 모멀묵이 된다. 동네에 잔치나 영장(장례식)이 나면 돼지를 잡고 접작뼈와 내장 삶은 물에 몸과 나물을 놓고 끓이다가 모멀가루를 개어 놓으면 되직한 몸국이 된다. 동네 어른들이 그 국 한 사발씩 먹고 추운 날 큰일을 도왔다.


모멀가루로 만든 빙떡은 겨울에 먹는다고, 혹은 빙빙 말아 만든다고 빙떡이라고 한다. 멍석처럼 말아 만든다고 ‘멍석떡’이라고도 한다. 빙떡 재료인 무와 모멀은 음식 궁합이 잘 맞는다. 차가운 성분의 모멀은 무를 만나 소화를 도와준다. 특별한 행사 때나 제사와 명절 때 빠지지 않던 특별한 음식이다.


모멀가루를 물에 잘 풀어 반죽을 만든다. 찰지지 않아 잘 찢어지기에 반죽의 농도가 중요하다. 주걱으로 떠서 자르르 흐를 정도 얇게 하면 된다.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 달구고 돼지비계로 닦으면 반지르르 윤이 난다. 다시 기름을 발라 반죽 한 국자를 떠서 바깥쪽부터 달팽이집을 그리듯 둥글게 부으면 지지직 고소한 소리가 난다. 굳기 전에 퍼지도록 국자로 빙글 돌려준다. 모멀전은 얇고 고르게 부칠수록 내공이 깊은 거다.

빙떡 속에 넣을 속은 수분이 많고 달콤한 겨울 무를 채 썰어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살짝 데친다. 참기름과 쏨쏨 썬 파와 깨소금을 뿌리면 향긋하고 고소한 냄새가 김과 함께 퍼진다. 무숙채와 모멀 전을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빙떡을 만든다. 차롱 뚜껑에 전을 펴 놓고 가운데 무숙채 속을 한 줌 올려놓고 김밥처럼 빙빙 말고 마지막에 양끝을 꾹 눌러준다. 그래야 빙떡이 풀어지지 않는다. 엄마는 날씬하면서도 봉긋하게 만들고 아버지는 속이 많아 불룩하다. 손매가 서툰 어린 우리는 말다가 찢어지거나 세게 눌러 터지기 일쑤다. 만든 빙떡은 차롱에 차근차근 담아 서늘한 곳에 놓는다.


원래 떡 이름이 ‘빈貧떡’인 줄 알던 나는 가난한 시절에 먹던 떡이라서 그런 이름을 얻었구나, 했다. 먼 나라에서 배 타고 온 가루도 아니고, 잣이나 대추 실고추 같은 우아한 고명도 없고, 층층이 무지개떡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다진 고기에 부추 양념 등이 들어가는 부티 나는 떡도 아니다. 누런 모멀과 무만 들어간 빈약한 떡이다. 가난한 시절 배만 볼록했던 아이들처럼 빙떡도 그랬다. 무를 슥슥 썰어 만든 속을 담아 도르르 만 볼품없는 음식. 그 속에 가난한 시절도 같이 말아 넣었을까. 그 떡이 웰빙 음식이 되었으니 빙떡도 세월 따라 팔자가 핀 거다.


모멀을 좋아하던 엄마는 명절 차례를 지내고 제기 정리를 다 하면, 차롱에 빙떡 서너 개를 담아 따뜻한 구들에 들어와 천천히 드시곤 했다. 몸살이 날 때는 모멀쌀을 넣고 부르르 끓여 드시곤 했다. ‘별것 아닌’ 슴슴한 모멀쌀죽이 엄마의 힘든 마음을 어루만지는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별로 마땅한 음식이 없어 모멀쌀죽을 드시던 걸 나는 엄마의 소울 푸드라고 여겼던 걸까.


메밀꽃 핀 밭


가을 모멀꼿이 천지에 피어 너른 밭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메밀밭에 들어가 사진 찍는 젊은이들이 아름답다. 달콤하고 자극적인 맛에 길든 젊은이들이 제주의 모멀 음식에서 새로운 맛을 발견하길 바라본다.


계절이 바뀌는 냄새가 참 좋다. 풀냄새가 진해지고 모과가 살찌고 대추가 익어간다. 강아지풀 씨가 여물고 겨울을 비축하는 살찐 냄새가 퍼진다. 어두운 밤에 가을이 오는 소식을 전하는 쓰르라미, 귀뚜라미 작은 소리가 들리는 별빛 쏟아지는 길. 발바닥에 닿는 촉촉한 흙의 느낌. 가을은 그렇게 나를 안을 준비를 하며 익어가고 있다.


날마다 달라지는 아침을 느끼며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안다. 세상이 익어가는 이 가을, 내 인생의 가을에 거두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하루하루 잘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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