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계약직의 설움을 온몸으로 받아내다.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텅 빈 공허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분명 머리는 텅 비었는데 가슴은 뜨거운 느낌. 누군가 한 마디 던지면 금방이라도 또다시 울음이 터질 기세였다.
옷을 갈아입고 엄마의 안쓰런 눈빛을 모른 척하고선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비로소 모두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던 그 순간, 굵은 눈물 방울이 마음껏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어졌다. 엄마가 들으면 속상할게 뻔하니까 이불을 입에 물고 소리는 죽였다. 가슴이 터질 듯 뜨겁고 답답해서 너무 더웠는데 내 가방 속 햄버거는 이미 식어버린지 오래였다.
인터넷 기사와 뉴스를 통해서 계약직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이야기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새 계약직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굳혀졌다. 필요할 때 쓰다가 그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자리, 그 단체의 일원이라고 느끼기엔 애매한 자리. 물론 그렇지 않은 계약직 자리도 있겠지만 적어도 25살 내가 경험했던 계약직은 그런 자리었다.
'꼬우면 정직원 되던가, ' '그렇게 불평불만할 거면 정교사가 되던가'.. 와 같은 비수 꽂는 말들, 계약직 근로자가, 기간제 교사가 투쟁을 한다는 기사에 무조건 달리는 말들이다(물론 나도 기간제 교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할 투쟁을 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긴 했다. 나는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차별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이해도 되고 공감도 가는데 역시 마음이 좋지는 않다. 어떤 누군가가 정직원, 정교사가 되길 원하지 않겠는가. 게 중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 누구도 처음부터 계약직 직원, 기간제 교사를 목표로 시작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력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능력은 있지만 기회가 부족해서.. 상상할 수도 없는 갖가지 사연들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나도 처음부터 기간제 교사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도 처음엔 정교사가 되길 꿈꿨다. 그렇지만 내 능력 부족 탓인지, 100:1을 호가하는 경쟁률 탓인지 나는 정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기간제 교사가 되기까지 나에겐 정말 많은 히스토리가 있었다.
독서실에서 15시간씩 외로운 싸움을 했던 대학교 4학년 시절, 노량진을 열심히 오가며 9호선 만차에서도 요약 카드집 암기를 멈출 수 없었던 그 시절, 하루 종일 하는 말이라곤 혼밥을 하고(그나마도 다 키오스크라 식사 주문할 때도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카페에 가서 '아이스 라떼 한 잔이요'가 전부였던 시절, 시험을 앞두고 기대감과 불안함에 휩싸여 가슴 두근거려 잠 못 이뤘던 시절, 공부가 너무 힘들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펜을 놓지 못하고 공부하던 그 자세 그대로 울음을 삼켰던 시절, 시험에 떨어지고 330개가 넘는 원서를 쓰고 부지런히 기간제 교사 면접을 보러 다니던 그 시절.
누군가에게는 쉬워 보이는 자리, 정교사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되는 자리, 정교사가 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되는 자리, 이렇게 보일 수 있겠다. 누군가에게는 맞고 누군가에게는 틀린 이야기. 그렇지만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는 건 이 자리에 있는 어떤 누구도 쉬운 마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진심일 테다.
4월이었나 5월이었나, 학교에서 근무한 지 2개월 넘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수업 중 불쑥 한 아이가 나에게 기간제 교사냐고 물었다. 순간 '어떻게 알았지?'싶어 물어봤다. 그랬더니 다른 어떤 선생님이 말해주셨단다. 어떤 선생님이 왜 그런 말씀을 아이들에게 굳이 전하셨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속상했다. 그래도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그래~선생님은 기간제 선생님이야. 회사를 갈지 계속 선생님을 할지 고민이 되는데 너네가 잘하면 계속 선생님 할 거고 너네가 속상하게 하면 회사로 가버릴 거야. 선생님 미래는 너네에게 달렸어!"라고 태연한 척 말했다. 그러자 그 반 회장이 "선생님 계속 선생님 할 수 있게 잘하자~~"라고 큰 소리로 말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고 예쁜 아이들이다.
나 스스로 어디 가서 교사라고 말할 때 꼭 앞에 '기간제'를 붙였다. 왜인지 그냥 교사라고 하면 당연히 정교사인 줄 알고 보내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하고 하고 있다는 그 느낌이 싫어서 먼저 '기간제'교사를 붙임으로 그 눈빛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가깝다고 느꼈던 친구에게 이 일로 상처를 받은 적도 있다. 이 친구의 진심은 아직까지 알 수 없지만 내 생일날 축하 카톡 메시지를 보내며 이렇게 썼다. '언젠가 진짜 선생님이 되길 기도할게.' 나의 피해의식 때문이었을까? '진짜'라는 표현이 마음에 꽂혔다. 그럼 나는 지금 '가짜' 선생님인 건가? 기간제 교사는 '진짜'가 아니고 '가짜'처럼 보이는구나. 출근길에 받았던 메시지였는데 너무 속상해서 그날 퇴근할 때까지 답장하지 못했다. 내가 노력하며 얻어낸 자리인데 이 자리가 가짜처럼 보이는구나 싶어서.
나는 1년 계약을 하고 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1년 일하고 나오는 게 맞았다. 그래도 기대를 하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 내가 가르치는 과목에 한 자리가 내년에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내심 기대를 했다. 하지만 한 자리는 내년에 복직하는 선생님 자리이기 때문에 기간제 교사는 두 명, 남은 자리는 하나가 되었다.
슬슬 재계약이냐 아니냐가 판가름될 시점이 왔고 부장 선생님께서 내가 기대할 만한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다. 내년에 함께 일할 수 있겠다는 그런 말들.. 그래서 나도 아닌 척하면서 기대를 많이 했다. 그리고 다른 부서 선생님들께서도 분명 내가 남게 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학생 만족도, 학부모 만족도에서 학교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점수를 받았으니 학교에서도 좋게 봐주지 않았을까? 기피업무인 학교폭력업무를 온몸 불살라 해내었으니 플러스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선생님들끼리 점심 식사를 하면 온통 우리의 주제는 재계약이었다. 아무래도 그 시즌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교장실로 내려오라고 메시지를 준다더라, 이 과목에는 자리가 난다더라, 어떤 선생님은 벌써 내년에도 같이 일해 달라는 언질을 받았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들으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는 과연 어떤 결과를 받아 들게 될까?
한 해동안 학교폭력 캠페인을 함께한 아이들과 활동을 마무리하며 햄버거를 먹기로 했던 날이었다. 그날 아침, '선생님, 4시에 교장실로 잠깐 와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나눠주고 함께 먹으려고 했지만 떨려서 입맛이 없었다. 그래서 콜라와 햄버거, 감자튀김을 가방에 넣어놓고는 바로 교장실로 향했다. 나는 기간제 선생님들 중 거의 마지막 순서였는데 내 앞의 선생님들은 거의 다 재계약이 확정된 상태였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안고 교장실 문을 였었는데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 두 분이 앉아계셨다. 아직 한 마디도 듣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느낌이 왔다. '아, 나는 틀렸다!'
'선생님, 한 해동안 고생 많으셨다. 처음인데 처음 같지 않고~~' 여러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거기에만 집중을 했어서 그런가. 그리고 역시 죄송하지만 내년에 함께 할 수 없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년에 함께 할 수 없다' 그 말에 가슴이 쿵 내려와 앉았다. 나에게는 합격의 목걸이가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지 알 수 있겠냐고 여쭤봤는데 그건 알려줄 수 없단다. 의아했고,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내 1년간의 교직생활에 대한 아무런 피드백을 받지 못한 채 쓰라린 결과만을 안고 교장실을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이대로 교무실에 올라가면 창피하게 거기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화장실에 가서 실컷 울다가 올라갔다.
이미 우리 부서 선생님들은 결과를 알고 계셨는지 착잡한 얼굴이셨다. 내부 사정에 의해서 막판에 결과가 뒤 바뀌었단다. 연신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이전 나에게 기대감을 심어주는 말씀을 하신 게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부장 선생님이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그때 그 말씀도 임용고시를 앞두고 있던 그때의 나에겐 큰 위안과 위로가 되었었으니 괜찮았다. 주책맞게 선생님들 얼굴을 보니 또 눈물이 나왔다. 결국 창피하게 선생님들 앞에서 또 울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너무 창피하다!! 너무 내 감정을 가감 없이 다 표출했던 것 같아서 말이다).
나를 만나는 선생님들 마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냐며 경악하며 나 대신 분통을 터뜨려주셨다. 나의 재계약 불발을 아쉬워하며 대신 화내 주는 선생님들이 계셔 마음만은 참 좋았다. 그래도 내가 첫 사회생활을 잘 해냈구나 싶어서.
결과가 나온 후 선생님들과 퇴근 후에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위로가 되는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이 선생님들을 내년에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퍽 서운했고 섭섭했다.
감사하게도 이다음 해에 학교를 옮긴 후에도 우리 부서 선생님들께 연락이 왔었다. 잘 지내냐는 안부의 연락도 있었고, 생일날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신 분들도 계셨고, 네 번째 임용고시를 앞두고 있었을 때는 시험 보고 당 충전 하라며 디저트 쿠폰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감사한 인연들. 나중에 내가 잘되면 꼭 양손 가득 맛있는 것 사들고 찾아뵙고 싶다.
밝힐 순 없지만 이후에 들은 여러 이야기로 짐작하기로는 내가 아주 모자라서 그 학교를 떠나게 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그 모든 '내부 사정'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참으로 즐거운 1년이었다. 말썽꾸러기지만 순수하고 예뻤던 아이들(지금도 가끔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곤 하는데 얼마나 컸을까,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지곤 한다. 학교를 자주 옮겨야 하는 기간제 교사의 아쉬운 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냈던 점심시간, 부서 선생님들과 교무실에서 시시콜콜 나눴던 수다들, 마지막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님들. 모든 게 서툴고 어려웠던 내가 무사히 1년을 보낼 수 있었던 까닭은 이 모든 도움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나에게 이런 모든 것들을 허락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다.
이렇게 나는 첫 학교에서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내 자리에 물건들과 책들을 보며 '얘네를 어떻게 집까지 옮겨가지?'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제발 그만 좀 울고 싶다'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