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병아리. 노래는 신해철이 어린 시절 육교 위에서 처음 만났던 병아리를 회상하며 시작된다. 1974년 봄이였나보다. 상자 속에서 만난 병아리는 긴 시간을 채 살아보지도 못하고 상자 속에서 그대로 생을 마감하는데, 후에 이름은 ’얄리‘라고 명명 됐다.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굿바이 얄리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는지
반복해서 듣다보면 구슬프게 다가오는 노랫말이다. 퇴근 후 집앞 주차장에서 한참이나 듣게 됐다. 20년전 들었던 그 느낌과는 또 다르다. 죽음이 그만큼 가까워졌나 보다.
죽기 전 그는 아내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죽어가는 얄리를 떠나보낼 때와는 반대로 죽어가는 처지에서 아내에게 마음을 전하는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왔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고 당신의 아들, 엄마, 오빠, 강아지 그 무엇으로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그는 비록 강아지로 태어나도 좋으니 아내와 다시한번 꼭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며 비장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는데, 신해철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였나 싶다.
그제 해운대 대학원 모임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한 ’유부녀‘ 선배가 잠깐 걷자고 해 바닷가를 걸으며 한참이나 얘기를 나눴었다. 선배는 묻는다. 진짜 다시 결혼 안할거냐며. 쳇바퀴 돌 듯 나는 또한번 여느 사람들에게 하는 대답을 똑같이 반복했다. “결혼을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안동 시골 바닥에 누가 있어야 하죠!!ㅎㅎ 나중에 선배가 서울 생활 지겨워지면 와요. 기다릴게ㅎㅎ”
실소 속에 여느 때와는 다른 씁쓸한 여운이 깃들었다. 앉으나 서나 당신만 생각하며 한 평생 살 법도 했는데, 사랑과 관계에서 만큼은 대부분의 것들이 망가지고 사라졌다. 그 결과는 외로움과 곤궁으로 완성됐고, 그 책임은 작금에 처한 현실로 지고 있는 셈이 됐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걸었다. 새벽3시30분. 종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해수욕장엔 선배와 나, 둘 밖엔 없는 듯 했다. 폭죽의 흔적과 저 멀리 짙은 어둠의 지평선은 우리의 이정표가 돼주었다.
’해변에서 만난 여인 많은 얘길 들려주었지/ 잃어버린 사랑으로 여기에 왔다고/ 돌아가면 나 역시도 혼자 될 거라고/ 새벽이 오는 바다에 앉아 얘길했지‘
나는 여름 하면 떠오르는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 가사 속에 우리가 있는 것 처럼, 잠시간 선배가 유부녀란 것도 잊은 채 나는 연인이 된 마냥 마음이 편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랬다.
누군가를 품에 안으면 따뜻해지는 그 느낌이 나는 참 좋았다. 신해철이 육교 위에서 작은 병아리를 처음 안았을 때 느꼈던 그 따뜻함과 별반 다르지 않을거다.
잠자리를 하며 젖가슴을 만지고 아침 저녁으로 섹스를 하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였다. 원초적인 것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이상적인 것들은 형해화 되기도 한다. 절망에 공감하며, 아름다움을 낳는 슬픔을 어루만지는 법도 언젠가는 찾아야겠다.
작고 가여운 병아리 얄리.
너는 사랑이였을까,
잠시 머물다 간 여름이였을까.
어느새 여름도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