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때 내 환자에서 시작된 자살과의 인연은 정신과 의사 34년 동안 결코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치료는 낭만이 아니었다. 죽고 사는 전쟁터였다. 정신과 의사 막 시작한 전공의 일년 차 때의 그 경험은 치료자로서 느끼는 가장 깊은 절망이었다. 그때 패인 상처는 의사 생활 내내 따라다녔다.
군의관 시절, 나는 자살 예방 사업에 혼자서도 매달렸다. 동료들이 보기에는 과도할 정도로 열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 열정이 사실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는 것을. 마치 상처 입은 동물이 본능적으로 치유의 행동을 반복하듯, 나는 다른 생명을 구하는 일에 매달렸다.
한때는 이겼다고 생각했다. 통계로 잡히는 한해 부대에서 자살자 숫자가 마침내 0이 되었을 때 내 안의 죄책감이 조금씩 상쇄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살린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나는 스스로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구한 생명의 숫자가 잃은 생명보다 많아지면 트라우마도 극복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상처는 산술로 계산되지 않았다. 백 명을 살리든 천 명을 살리든, 가슴 깊은 곳의 그 아픔은 여전히 제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도 그 상처는 희미해지지 않았다. 우두커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살아 있는 채로
상처를 이겨보려 할수록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정면으로 맞서면 더 큰 파도가 되어 나를 휩쓸었고, 등을 돌리고 도망가면 갈수록 그림자처럼 더 끈질기게 따라왔다. 그 악순환 속에서 절망감만 쌓여갔다.
절망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상처를 없애려 하지 말고, 상처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것은 항복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용기였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위기를 넘어가면, 더 큰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한번 넘어간 위기는 다음에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성장한 것이었다. 도전과 상처를 통해 우리의 삶이 성장해 나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고, 나와 세상을 나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중국의 고사성어 '목계지덕(木鷄之德)'에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다.
주나라 선왕이 최고의 투계를 원했을 때, 명성 높은 조련사 기성자에게 닭을 맡겼다. 첫 10일 후 왕이 물었다. "준비됐느냐?" 기성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교만함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10일이 더 지나자, "교만함은 사라졌으나, 외부 소리나 움직임에 지나치게 예민합니다." 또 10일 후에는 "여전히 상대를 노려보는 눈빛이 너무 공격적입니다."
마침내 마지막 10일이 지나고, 기성자가 말했다. "이제 준비됐습니다. 그 어떤 소리나 위협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마음이 완전히 평정되었습니다.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닭 같습니다. 다른 닭들은 이 모습만 봐도 도망갑니다."
내 마음의 잡념을 걷어내고 치료자로서의 고요한 위엄을 갖추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담실에서 환자와 마주 앉을 때, 나는 이제 언어 너머의 것들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깊은 교감 속에서 상처의 깊이를 느끼고, 미미하지만 분명한 자살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환자들도 때로는 진짜 위험을 가벼운 말로 포장한다. 이솝 우화의 양치기 소년 이야기처럼 세 번째 거짓말에 속으면 안된다. 우리는 세 번째 외침을 알아듣고 늑대를 물리치러 나서야 된다. 미묘하게 증가 된 긴장, 다급해진 숨소리에서 그 차이를 느껴야 한다.
귀로 들으면 안 들린다.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이쯤 되면 나 같으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은데, 당신은 괜찮았나요?"
이런 말에서 환자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안도감과, '들킨 사람'처럼 긴장하면서도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라는 복잡한 마음. 그 순간 환자는 긴장을 내려놓고 자신의 고통을, 자살 생각에 이르기까지의 힘든 과정을 쏟아 놓는다.
마음의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오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을 '정신과 시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피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상처를 정확히 도려내야 한다. 수치심을 건드리면 불필요한 고통을 지불해야 하고, 환자는 더 깊이 숨어버린다.
삶의 무게에 대하여
자살이 매우 심각한 병이나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어떤 이유도 자살을 합리화할 합당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고통의 정도도 상대적이다. 본인에게는 죽을 것 같은 천근의 무게도 어떤 이에게는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 막다른 골목에 갇혔다고 느낀다. 그런 이들에게는 방향만 바꿔줘도 희망이 보인다. 먹고 자는 것만 좋아져도 일단 한숨 돌릴 수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잘못된 경우는 없다. 일부분이 기능하지 못하면 그 부분이 확대되어 보인다. 자신 전체가 문제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이 수치심이다.
환자가 가져오는 자살 이슈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하지만 진지한 것과 무거운 것은 다르다. 경험이 쌓이면 진지하지만 가볍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사실 삶도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다. 무거우면 잘못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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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간의 여정을 돌아보며, 나는 이제 내 상처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도망가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는다. 두렵지도 않다. 외면하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감정들이 걷히고 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