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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당나귀 Nov 04. 2024

더 룸 넥스트 도어

사랑하는 이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

아주 오랜만에 보고싶은 영화들이 나왔다. 오랜만에 극장에 갔다. 두 여성 배우들의 얼굴이 포스터를 차지하고 있는 <더 룸 넥스트 도어>도 보고싶었고,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도 보고싶다. 오랜만에 관심 가는 영화들이 나와서 기쁜 마음이다. 


극장에는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바가 있었고 티켓과 와인과 차를 사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영화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을 수용할 만큼의 공간이 없어서 빽빽하게 서 있었다. 화장실에는 치마 입은 여자, 바지 입은 남자 표시가 아니라 영화속 인물이 문에 붙어있었다. 여자 화장실에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행복하게 뛰어가는 율리에가 붙어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믿음이 가는 극장이었다. 


같이 간 친구와 나를 제외하면 관객중에 20대는 없어보였다. 과장이 아니라, 20대가 아니라 젊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앞좌석 뒤에 작은 나무 선반이 있어 음료를 두는 테이블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이 주로 혼자, 아니면 다른 할머니와 같이 보러 왔다.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며 토요일에 영화를 보는 할머니라, 행복한 노인을 상상하면 그런 모습일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s1pP6erMQ


시작부터 음악이 너무 좋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잉그리드(줄리앤 무어)와 마사(틸다 스윈튼). 마사의 병실에서 그들은 마사의 남과 다름없는 딸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과거 장면들이 중간중간 나와서 이야기가 계속 과거 시점과 교차해서 진행되는 건가 생각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죽음을 다룬다. 마사의 애인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직업을 다른 도시로 구해 마사와는 헤어지지만 아이가 생기고, 마사의 애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하지만 그는 불타는 집에서 살려달라며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고 환청을 듣고 뛰어들었다가 죽는다. 


자궁경부암 3기지만 새로 개발된 치료법에 차도가 있다며 영화 초반에 마사는 삶에 대한 희망으로 차있다. 하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치료법이 실패했다고 절망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 되었고 의료진은 다른 치료법을 시도해보자며 권한다. 하지만 마사는 결연한 표정이다. 잉그리드와 영화를 보러가서 뜬금없이 자신이 다크웹으로 안락사 약을 구했고, 집이나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장소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잉그리드는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하지만 마사에게 지금 이 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마사의 계획은 집이 아닌 멋진 곳에서 한달 간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다. 그래서 자신이 죽을 때 옆 방(the room next door)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잉그리드의 처음 반응은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 공감이 됐다. ‚치료 끝까지 받아보자‘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 깃든 말을 했다가 ‚우리는 몇 년간 연락두절이었다. 너와 더 친한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아? 네 딸은?‘이라는 반응도 보인다. 잉그리드는 막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룬 책을 출간한 작가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제목이 의아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감이 the room next door인 것 같다. 역지사지는 어렵고 내가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공감할 수는 없다. 타인이 죽을 때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를 쓰기는 어렵지만 그를 지지하며 옆 방에 머무르는 정도가 최대한의 노력이다. 마사가 ‚죽을 때 내 손을 잡아줘‘라고 했으면 나는 승낙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건 뭔가 친족, 혈연의 영역이라는 생각때문일지도. 하지만 마사가 내가 죽을 때 외롭지 않게 옆방에 있어줘,라고 했으면 나는 거절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얼마전부터 우정을 생각하고 다루는 방식에 대해 고민했다. 나와 같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은 (당연하게도)나와 같지 않고 앞으로 삶은 더 달라질 것이다. 친구들의 선택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아질 것이고, 어쩌면 보따리 싸서 결사반대를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 연인과 달린 ‚친구‘의 역할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한정적이다. 사람들은 가족과 연인에게서는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일 조언을 구하고 미래를 설계하지만 친구에게서는 참고용 정도의 조언을 구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프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지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나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더라고 친구의 선택을 믿고 지지하는 것으로. 그리고 친구가 지칠때면 돌아올 수 있도록. 


마사와 잉그리드는 절친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공백이 있는 사이다. 몇년간 만나지 않다가 마사가 암에 걸린 소식을 듣고 잉그리드가 깜짝 놀라며 찾아간다. 둘은 고급 저택에서 한달간 시간을 보내며 아주 친밀해진다. 체력이 약해지고 옷 정리에도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들어가는 마사는 ‚너는 내 간병인이 아니야. 내 짐은 내가 풀게‘라고 한다. 종군기자였던 마사는 글을 쓰려고 해도 뇌에 구멍이 난 것 같다며 글이 써지지 않고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괴로워한다. 


마사와 잉그리드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 같았다. 잉그리드는 매일밤 마사가 살아있을지, 죽음을 택했을지 두려워한다. 새벽에 눈을 떠 마사의 방문을 확인하다가, 방문을 열고 잠들어있는 마사 뒤에 잉그리드가 조심스럽게 눕는다. 마사는 눈을 뜨고 살짝 웃는다. 마사가 혼자 죽음을 택할 시간도 없이 새벽을 내내 같이 보내기도 한다. 졸린 눈을 부릅 뜨고 새벽 내내 영화를 보는 모습은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 같지 않다. 오늘은 마사가 아직 살아있나 확인할 필요 없는 잉그리드의 말, '벌써 날이 밝았어'.


잉그리드가 마사의 옛 연인(?)이자 자신의 현 연인을 만나러 갔을 때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남자는 기후 위기에 대해서 말하며 모두가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고 심각하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마사가 매일 아침 살아있는 것을 볼 때 기쁘다며, 마사와 함께 매일매일 삶을 새롭게 느낀다고 말한다. 매일 매일을 새롭게 느끼는 것은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운 것은 점점 줄어가고 지루함과 불만은 쌓여간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매일 매일 하루 하루는 사실 듬뿍 사랑하기도 짧은 시간인 거다.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에서 우에노 지즈코 작가는 안락사를 반대한다. 인간이 어릴 때나 늙어서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했던 일을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사회가 이를 보장해야한다. 나는 이 말에도 동의한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너무 오만한 생각일까? 하지만, 병실에서 원치 않는 치료를 이어가다가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은 절대 싫다는 마사도 이해가 간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끝없는 희망 고문과 고통,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마사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죽는다. 그 모습이 죽음보다는 햇볕을 즐기는 일광욕 같아서 죽음이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특히 틸다 스윈튼의 모습은 정말 화보 같았다). 잉그리드는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유족이 되어 경찰 진술을 하고 마사의 딸을 마주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만약 마사가 가족이나 연인 혹은 배우자에게 내가 죽을 때 옆방에 있어달라고 했더라면 사회의 의심은 더 커졌을 거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없는 친구도 살인으로 의심을 받는데, 법적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사회에서 ‚더 친밀한 관계‘인 연인이라면 살인이라는 의심은 확신이 된다. 존엄사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로 너무 가깝고 가깝기가 요구되는 가족, 연인, 배우자는 마사의 곁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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