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경우 없는 세계

by 어린당나귀

‘사랑받고 자란 티’가 유행했었다. 금수저, 은수저에 이어서 사랑수저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더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타고난 것에 대해서, 자신이 결정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서 비교하고 시샘하고 순위를 매긴다. 금, 은, 동, 갑, 을, 병, 정.


<경우 없는 세계>의 인수도 받은 만큼의 사랑을 기준으로 남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쟤는 믿을 구석이 있어서 역시 막나가고 쾌활했던 거야, 내가 저만큼의 사랑을 받았으면 나는 절대로 안 삐뚤어졌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반면 경우에 대해서는 사랑받지도 못하고 자란 아이가 왜 저렇게 배려하고 반듯하고 예의있지,라고 의심한다. 주변인들을 그들이 자라면서 받아온 사랑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질투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결핍이 있겠지만, 인수는 부모에게서도, 학교에서도, 누구에게서도 사랑받는다고 느낄 만한 순간이 없었다.


이 책은 초반부터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인수는 과거의 경험들로 귀신들을 보고 환청을 듣고 항상 뼛속까지 춥다. 소장님이 젊은 사람이 뭘 그렇게 추워하냐며, 이번 겨울은 그렇게 춥지도 않고 추워야 벌레들이 다 죽어서 좋다고 얘기한다. 나도 내가 수업에서 배운 내용대로 기후위기로 겨울에도 영하의 날씨가 지속되지 않으면 병충해가 늘어난다고만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더 추운 겨울에 난방이 끊긴 집, 바람을 막을 수 없는 집, 혹은 거리에서 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인수를 중심으로 가출 청소년, 거리의 청소년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자세하게 그린다. 현실에서는 더한 일들도 일어나겠지만, 책에 나온 사건들만 소화하기에도 벅찼다. 인수가 어머니를 때리고,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를 피해 나온 후 점점더 위악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쪽으로 변하는 성연과 ‘행복한 우리집’을 돌보고 다치면 병원에 데리고 가고 직접 옷을 빨래해서 입고 어른들에게 예의있게 대하고 도둑질은 하지 않는 경우를 만난다. 인수는 주변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는 성연의 행동을 보고 배우지만 마음속으로는 경우를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한다. 다른 가출팸들이 경우를 무시할 때는 잠자코 있지만 경우가 어머니와 같이 사는 꿈을 이루기를 꼭 바란다.


10대 후반에 겪은 사건들과 폭력, 죄책감은 30대 인수에게 매일 생생하다. 30대가 됐다고 하지만 사실 인수는 매일 그때를 살고 있다. 집안에 윙윙 고여있는 유령들과 함께. 그런 인수에게 자신의 그때 모습과 너무 닮은 이호가 나타난다. 얼떨결에 이호와 지내게 된 인수는 추위에 덜덜 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언제 이 안도감이 끝날지 불안해한다. 이호는 ‘아는 형들’이 소개해준 학력무관 경력무관 나이무관 일을 시작한다. 인수가 겪었던 것처럼, 미성년자를 속이고 제대로 노동의 값을 지불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인수는 이호에게 그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지원해줄테니 학교에 돌아가 공부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호는 집을 나간다.


‘비빌 언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한 사람에게 비빌 언덕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비빌 언덕은 인생에 무슨 일이 생겼건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인생 망했다고 생각이 들어도 다시 솟아날 구멍이다. 작가의 말은 ‘나에게 비빌 언덕이 없어도 남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건 매우 힘든일이다, 하지만 가능한 일이다’로 다가왔다. 삶의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을까. 그래서 경우의 배려와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왔을지 궁금하다. 돌려 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인수의 이빨 신경치료 병원비를 내주고 매일 편의점 죽을 사다 나르는 그 마음.


이호가 다시 돌아온 이후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인수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나 같은게 뭐라고 생각이 들지만, 어른인 척하면서 대답하기도 한다. 10대의 인수 자신에게 필요했을 말들이 지금 이호에게도 필요하다. 하지만 인수는 이제 더이상 나도 이런말을 해줄 어른이 있었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이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면서도 도와줄테니 이호가 공부를 꼭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렸을때부터 사람에게 잘하는 것은 결국 다 나에게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 내가 베푼 호의가 나에게 바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이 책은 어쩌면 애매모호한 그 미신같은 말의 구체적인 증거 같기도 하다. 이 세상에 경우는 없지만, 그리고 경우는 죽기 전에 도둑질을 하는 사람으로 변했더라도, 경우가 살아온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인수는 남의 상처를 보았을 때 이럴 때 경우는 어떻게 했을까,라고 떠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책의 결말 이후에도 인수는 이호를 위해 약국에서 마데카솔을 사다줬을 것이다. 경우가 어느날 인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묘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날의 폭행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을 살아갔다. 부부 동반 모임에도 빠짐없이 나갔고 결혼기념일에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 다음 날에는 다시 폭행, 그다음 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않아 밥을 먹었다. 이런 일관성 없는 일상에 대해서라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반복되어온 일이라 초연해질 법도 한데 나는 점점 더 심한 멀미를 느꼈다.

두 사람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내가 유별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를 가여워하고 애처로워하는 마음을 서운함이 앞질렀다. 내가 희생한 보람도 없이 너무도 쉽게 아버지를 용서하고 상황을 무마해버린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주점에서 일할 대는 아무도 나와 성연에게 부모님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기들이 아무리 욕하고 때려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보호해줄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함부로 대했다. 아버지가 귀에 박히게 말한 대로 ‘부모 없어 보이는 애’ ‘자존심 없어 보이는 애’ 취급을 받았다. 단란주점 매니저는 심지어 우리가 미성년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단 한번도 학교 출석 여부와 대학 진학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가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오늘 밤을 새울 수 있는지, 주말에 대타를 할 수 있는지, 위조한 신분증이 있는지 없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경우는 안전한 공간에서 어른들의 예쁨을 받으며 지냈다. 경우와 지낼수록 나는 궁금했다. 특유의 신중함과 타인을 향한 예의는 과연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스스로 터득했다기에 그 태도는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경우 같은 존재는 왜인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경우는 자신이 일곱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살았다는 것을 어느 날 내게 말해주었다. 함께 지내던 쌍둥이들도 그곳 출신이라고 했다. 경우는 살면서 단 한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어머니와도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사실은요, 공부를 다시 할까, 학교에 다시 갈까, 그런 생각 계속 하긴 했거든요. 근데 제가 학교 가면 다들 싫어할 것 같아요. 가면 착한 척해야 하는데 솔직히 그것도 어렵고, 이미 늦었나 싶기도 하고요.”

나는 이호의 고민에 그럴듯한 정답을 내주고 싶었지만 그런 걸 내가 알 리 없었다. 그때 이호 손등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담뱃불로 지진 흔적 같았다. 무심코 경우라면, 상처에 바를 약을 사다주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안 늦었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 도와줄게.”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후회를 곱씹는 일에만 성실히 복무했다.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삶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소심한 방식으로 사과를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건 경우가 전혀 바라지 않는 방식일 테지.




책을 읽으면서 작년 엄청 몰입해서 봤던 웹툰 <집이 없어>가 많이 떠올랐다.

또 생각나는 책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청소년 쉼터 후원을 하고싶은데 혹시 추천해줄수 있는 단체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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