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와 뽀뽀의 정치학

by 어린당나귀

용기가 없어질 때 보고 또 보는 책, 영화, 만화, 그림같은 게 있으십니까.


나에게는 그런 게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다. 매년, 반년, 혹은 분기마다 용기가 없어질 때는 오니까 지금까지 10번 정도 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가장 많이 본 영화일수도. 꺼내보고 또 꺼내보는 것들이 닳지 않는 이유는 매번 좋은 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아름답고 재주 많은 하울이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유독 강한 소피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소피가 폭싹 할머니가 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진짜로) “어떡해”라고 소리치지만 소피는 보는 나보다 더 의연하다. 그는 다음날부터 할머니의 좋은 점을 찾기 시작한다. 이만한 나이에는 더 놀라울 것도 없다, 이는 아직 튼튼해서 다행이다. 그 태도에 나도 소피가 할머니가 된 건 그렇게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믿어버린다.


이번에는 소피와 하울의 사랑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에 집중하게 됐다. 하울이 사랑하는 방식은 소중한 존재를 위해서 전쟁에서 싸우고, 지키는 방식이다. 하울이 여태까지 전쟁의 방관자로 회피하며(회피하는 게 나쁜일은 아니다) 살아왔다면 소피가 소중해진 이후에 ‘너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라고 한다. 하울은 마치 아이는 아빠와 같이 주말에 놀이동산에 가고 싶지만 아이를 위해 돈을 많이 버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주말 출근을 마다않는 아빠같다. 그도 그럴것이 하울은 밤 늦게 들어오거나 며칠째 들어오지 않으며, 조용히 들어와서 자고 있는 소피의 얼굴을 한번 보고 간다. 식구가 늘어나자 하울은 깨끗하고 넓은 집으로 이사 하고, 소피가 이전에 살았던 모자가게 방과 둘이 처음 만난 아름다운 초원을 선물한다. 소피는 그럴수록 ‘네가 떠날까봐 겁나’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이 이제 이해가 된다. 하울은 자기 없이도 소피와 (아마도 전쟁 고아일)마르클, 캘시퍼, 황야의 마녀가 잘 살 수 있도록 채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피가 가만히 보고 있을 인물인가! 하울이 만들어준 크고 무거운 집은 방해만 될 뿐이라는듯 무너뜨리고 빨리 하울에게 데려다달라고 한다. 이대로 하울 혼자 싸운다면 죽을 것이라는걸 예감하고. 하울은 겁쟁이로 사는 게 어울려! 하며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한다. 겁쟁이도 괜찮고 회피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행운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더 높게 잘 되기를 바라는 게 실패해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지붕도 날라가고 판자떼기가 된 성을 움직여서라도 하울을 만나러 가는 소피의 모습이 무모하지만 닮고 싶다. 오랜만에 심장을 갖게 된 하울에게 “마음은 원래 무거워”라고 하는 소피의 멋짐.


소피는 세번의 뽀뽀로 전쟁도 종식시킨다. 첫번째 뽀뽀는 황야의 마녀에게 뽀뽀. 마지막까지 하울의 심장을 내주지 않으려고 하는 황야의 마녀를 꼭 안고 부탁한다. 그를 미워하지 않고 심장을 내줘서 고맙다고 한다. 두번째 뽀뽀는 캘시퍼의 뽀뽀. 캘시퍼는 다행히 죽지 않고 자유다!!하면서 날아가지만 불로 산 시간이 오래되어 비가 올까봐 무섭다며 돌아온다. 캘시퍼는 소피의 뽀뽀를 받고 기뻐서 불이 톡톡 튄다. 세번째 뽀뽀는 무대가리 뽀뽀. 진정한 사랑의 뽀뽀를 받은 무대가리는 멀끔한 이웃집 왕자님으로 돌아온다. 사실 무대가리야말로 소피가 힘들고 필요할 때 항상 곁에 있었던 순애보였다.. 아무튼 무대가리가 돌아오자 설리먼 선생님도 ‘바보같은 전쟁을 끝내볼까’라고 한다. 전쟁이 이렇게 금방 간단하게 끝나면 좋겠다. 오해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것 같이.


작년에도 소피의 용감하고 무한하게 다정하고 강한 마음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썼던 것 같아 찾아봤다. 3월 즈음에 “하울이 죽네 사네 하는 순간에 하울의 심장을 욕심 내는 할머니를 안아주자. 소리치지 말고 다정해보자. 짜증과 화가 많은 나에게 제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매일 반성하고 다짐하는 일이다. ”라고 썼다. 면접을 본 후에 용기가 필요해서 이 영화를 찾았던 것 같다. “저주니 운명이니 하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것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힘을 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용기가 없을 때 소피를 본다. 소피가 일단 밥부터 많이 먹고 힘을 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멋있다. 소피가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 소피 주변인들도 변한다. 마르클과 캐르시퍼는 전보다 더 신나보인다. 그래서 해방된 악마 캐르시퍼도 자유보다는 소피랑 지내는 게 더 재밌다고 하며 돌아온다.”라고도 썼다.


소피는 언제 어디서든 한결같이 나한테 힘을 주는 존재였나보다. 내가 용기를 얻는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구나.


소피가 이뤄낸 가족이 정말 대안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로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를 지켜준다. 마르클, 캘시퍼는 소피와 함께 사는게 제일 좋다고 선택했고, 적수 설리만 선생님의 개도 소피를 따라왔다. 아마도 하울의 전애인일지 모르는 황야의 마녀 할머니까지…! 소피에게 저주까지 내려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일까 의아하지만 같이 복작복작 밥먹고 살다 보면 정이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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