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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당나귀 Jun 19. 2023

퀴어와 젠더트러블 발레, 모던 <지젤>은 레즈비언

뮤지컬과 발레 보는 것을 무지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불편한 지점들이 많아졌다. 어렸을 때 가사를 다 외웠던 <오페라의 유령>은 커보니 지독한 스토커였다. 발레 중에서는 <지젤>을 제일 좋아한다. 하지만 ‘지고지순한 사랑’, ‘처녀 귀신’, ‘순결한 지젤’… 등등 수식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본인을 속여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남자가 뭐가 예뻐서 죽어서도 죽을힘을 다해 춤을 춰준단 말인가! 하지만 그 간절한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독무가 제일 멋있다. 나는 항상 주인공 지젤도 아니고, 왕자도 아니고 윌리들의 여왕 마르타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귀신들의 여왕으로 끝까지 죗값을 치르게 하는 그녀. 손동작 하나로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만들 수 있다.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도 멋있다.


이번 학기에 공작새와 발레를 배우면서 우리 둘의 발레에 대한 관심도는 최상이 되었고 틈만 나면 손끝을 쳐다보고 우아하게 팔을 올리는 자세를 하면서 놀려댔다. 그러던 차에 <지젤> 공연을 보러 갔고, 현대적 해석을 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흥미로웠다. 익숙한 음악을 라이브로 듣는 건 좋았지만 이 음악에 나와야 할 발레 동작들이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1막은 발레라는 무용 자체를 모욕(?)하는 것 같아 ‘학예회 수준이군 다신 보지 말아야겠어’라는 생각을 조금 했다. 발레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없이 그 슬픔과 기쁨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무대에서 자꾸 함성을 질렀다. 함성을 지를 때마다 집중도가 깨졌지만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던 지젤을 다시 보고 싶은 이유는 젠더트러블적인 면모 때문이다.


고전 발레들은 아주 옛날에 만들어졌던 것이라서 음악이나 플롯, 심지어 의상까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발레리노가 나올 때는 의기양양한 트럼펫이나 관악기가 크게 울리고 발레리나가 나올 때는 하프나 첼로 같은 현악기가 나온다. 나는 이런 공식이 조금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 항상 ‘공주’와 ‘왕자’가 있고 왕자가 공주를 구원하는 시나리오다. 그래서 언젠가 레즈비언 발레가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던 지젤의 1막은 고전 지젤의 1막 세트를 설치하고 연습하는 데서 시작한다. 구석 의자에서 두 명의 여자들은 튀튀를 입어보기도 하고 또 사랑을 속삭이고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의 언어인 둘만의 춤을 만든다. 그래서 사랑이 무르익자 발레 의상이 아닌 온갖 반짝이를 입은 무용수와 무대 설치자가 나와 둘을 번쩍 들고 축하해 준다. 둘은 무대에서 키스한다.


이 지점에서 궁금했던 게, ‘이 무대를 보고 있는 반 이상의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앨라이인가?’였다. 클래식 공연이나 오페라, 발레의 관객은 반 이상이 고령층인데 모던 발레도 예외 없이 그들이 객석을 가득 채운 게 멋있었다. 아니면 그들도 나처럼 사전정보 없이 떡하니 온 걸까? 독일에서 동성혼 합법화가 된 지 꽤 오래 지났지만 정작 그 법안을 통과시킬 때 연방 총리였던 앙겔라 메르켈은 종교적 이유로 개인적으로는 반대한다고 했다. (남의 결혼을 타인이 반대하고 말고 할 수 있나 싶지만…) 아무튼 내 앞의 아저씨는 자꾸 같이 온 여성 파트너를 쳐다보는 모습이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아 보였다.


지젤의 묘미는 1막의 파국과 2막이다. 모던 지젤도 해피엔딩을 맞을 수는 없었으니.. 지젤의 여성 파트너 바틸다가 사실은 남성 약혼자가 있었다. 약혼자는 키스하고 있는 두 연인 사이에 끼어들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춤을 웃기게 췄다. 결국 바틸다는 둘 사이를 갈등하다가 원작처럼 약혼자와 떠나버린다. 남겨진 지젤은 실제로 무용수들이 무대 바닥을 뜯어서 해체하는 와중에 혼자 미쳐서 죽게 된다.


1막을 다 보고 나니 2막이 궁금해졌다. 과연 바틸다는 지젤을 찾아올 것인가? 그럼 바틸다는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가 정말 죽어버릴 것인가? 5월에 한국에서 고전 지젤을 본 엄마는 내가 모던 지젤을 보러 간다고 하자 ‘현대에서는 용서하지 말고 다 죽였으면 좋겠네…’라는 말을 남겼다. 항상 우리가 끝을 알면서도 안타까워하는 지점이다. ‘아 저걸 왜 살려줘! 그냥 죽게 놔뒀어야지!’


2막이 열리자 나이 든 바틸다가 하얀 꽃을 들고 지젤을 추모하러 온다. 그러자 바로 젠더트러블적인 무용수들이 나오는데.. 발레리나는 식물 같은 것으로 치마를 해 입고 발레리노들이 모두 긴 튀튀를 입고 모두 지젤과 똑같은 모습의 유령으로 등장한다. 게다가 위에는 아무것도 안 입어서 가슴털이 다 나오고…!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발레리노가 있었다. 남성이 치마를 입고 발레리나 춤을 춘다는 것, <빌리 엘리엇> 그 자체 아닌가. 발레리노는 점프만 잘하면 된다는 내 편견이 깨졌다. 튀튀를 입은 가슴털 난 발레리노들은 구슬픈 춤도 잘 췄다. 게다가 젠더 트러블의 최고봉은 똑같은 머리를 하고 똑같은 옷을 입은, 그래서 사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무용수들이 짝을 이뤄 춤추는 장면이었다. 튀튀X튀튀의 조합은 전혀 상상도 못 했고 예쁜 옷을 둘 다 입고 있으니 두 배로 아름다웠다.


2막에서는 바틸다의 일생과 지젤의 일생을 보여준다. 별다른 설명 없이 극이 전환된다는 게 이해가 잘 돼서 신기했다. 결국 바틸다는 그 약혼자와 결혼식도 올리고 금쪽같은 딸도 키웠다. 그러면서도 종종 지젤을 생각한다. 반면에 지젤은 장례식 장면 밖에 없다.


아무튼 결국 젊은 시절의 바틸다와 유령 지젤이 마지막 혼신을 다한 춤을 추고 나이 든 바틸다는 면사포를 쓴 유령들 사이에서 지젤을 찾으려다가 유령들의 물결에 쓸려간다.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인 것 같다.


전혀 사전정보 없이 봤던 현대극 지젤을 추천하고 싶다. 우선 고전 지젤을 먼저 보고 현대극을 보면 줄거리를 비교하면서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도 레즈비언 발레를 볼 수 있게 되기를. 현대무용이 아니라 딱딱하고 상투적인 발레에 퀴어 물결이 분다는 게 반갑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공연이 열린다면 무슨무슨 단체에서 그 앞에서 반대 시위를 하지는 않을런지, 퀴퍼에서 흔히 보이는 광경이 펼쳐지지는 않을지, 그런 상투적인 장면들이 눈앞에 선하다.



https://youtu.be/8nxsc86B_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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