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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행생활자 Jan 25. 2024

숨겨놓은 자식 vs 숨겨놓은 대출 뭐가 더 나쁠까

가끔 미치도록 이걸 말해주고 싶어질 때가 있어.

예비부부가 디딤돌 대출을 신청하러 왔다.


사실 "예비"부부에게 신혼부부 자격의 대출을 해주는 것이 이해는 잘 가지 않는다. "예비"부부에게 신혼부부용 전세자금 대출을 해줬는데, 기한 내 혼인관계증명서가 안 들어와서 연락해 보니 파혼을 했단다... 덕분에 내가 경위서를 올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파혼은 내 잘못이 전. 혀. 아니지만, 결혼예정자 자격으로 대출이 나갔는데, 혼인관계증명서가 안 들어오니 쨋든 이것 또한 나의 몫.


남자는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고, 여자는 남자보다 두 살 어렸다. 나는 아직 미혼 무주택자인데, 이 남자 고객은 결혼도 할 예정이고, 집도 살 예정이라 왠지 모를 부러움이 살짝 생기기도 했다.


남자는 작은 회사에서 생산직으로 5년 정도 일하고 있었고, 여자는 동네 병원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청첩장과 결혼식 견적서도 가져왔고, 무주택 조건이나, 주택 면적 조건 등 대충 봐도 디딤돌이 가능해 보였다. 남자는 계약금을 내기 위해 받은 신용대출이 아주 조금 있다고 했고, 여자는 대출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다만, 여자가 깜박하고, 급여명세서를 가져오지 않아서 부부합산 소득 8,500만 원을 넘지 않는 건지 판단이 불가능했다. 본인들이 계산해 본 바로는 넘지 않는다길래, 일단 심사에 필요한 동의서(신용정보 조회동의서)들과 서류를 받고, 급여명세서를 보완받기로 하고 그들을 보냈다.


그날 마감 후 여자가 급여명세서를 보완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대충 전산을 태워보고 있었다. 예비부부로 대출을 신청하면, "부부"의 자격으로 대출을 받기 때문에 두 명 부채를 합산해서 dti를 초과하지 않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엥? 이 여자 대출 없다며?"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대부업", 그리고 이어지는 캐피털, 카드론과 현금서비스. 대부업 천만 원과 캐피털 2천, 카드론 현금서비스 합산 약 천만 원. 합산 대략 4천 이상.


분명히 대출 없다고 했는데... 그리고 더 큰 문제(?)라면, 대부업과 카드론의 최초 대출일자가 2년 전쯤으로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달 사이라면 뭐 혼수라도 마련해야 해서(물론 혼수를 대부업과 카드론으로 마련하는 것도 이해는 안된다) 급전이 필요했나 하고 생각이라도 해볼 텐데, 그것도 아니고.


가만 생각해 보니, 여자는 분명 남자한테 본인이 대출이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대출이 있으신지 물어봤을 때, 없다고 했겠지.


어차피 소득금액을 넣을 수 없어서, 심사도 할 수 없는 이 예비부부의 대출건은 접어 두고, 다른 대출을 올리면서 내 머릿속으로는 사랑과 전쟁이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에 나의 배우자가 대출이 없다고 속이고 나와 결혼했으면 어떨까?"


이혼 사유감이지. 심지어 그게 대부업이다? 더더욱...


차라리, 여자가 대출이 많아서, dti가 초과하고, 그래서 남자가 여자가 대출 있는 거 알고, 결혼 진행을 여부를 결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빚까지 떠안아주는 거라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나 같은 일반인은 그럴 자신이 없다. 그녀가 어쩌다가 대부업에서 돈을 빌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부업에서 돈을 빌리는 용기도, 돈을 빌려야 했던 사유도(가족 병원비 제외), 대부업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신용도도 내가 품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들이다. 


며칠 후 그녀의 급여명세서가 들어왔다. 정말 드라마틱하게 부부합산 소득 8,500만 원을 100만 원 정도 초과했고, 남자는 단독세대주에 30살 미만인지라 디딤돌 대출을 진행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대출을 못해주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때가.


그들의 소득이 8,500만 원이 넘지 않고, 디딤돌 대출을 진행하다가, 여자의 대출과다로 dti가 초과돼서 대출이 불가한걸 여자에게 알리고(개인정보이기 때문에, 내가 여자의 대출 유무를 남자에게 알릴 수는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 숨겨놓은 대출이 있다고 본인입으로 남편 될 사람에게 말하는 게 소시민적인 행복한 결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도 그가 그녀와 결혼하면 이건 로맨스가 되는 거고, 그러한 사유로 그가 그녀와 파혼한다면 이건 네이트판식 통쾌한 결말이 되는 거고. 전자도 손뼉 쳐줄 생각이 없고, 후자도 비난할 생각이 없다. 그저 국민의 알 권리처럼 그의 알 권리도 충족되길 바랐을 뿐이다. 이걸 모르고 결혼하는 건 정말 너무 하잖아...


그에게 부부합산 소득이 8,500만 원이 넘고, 단독 세대주라 디딤돌은 불가하다고 유선 통지를 했고, 은행에서 하는 일반 주택담보대출이라도 받으시겠냐 물었다(물론 금리는 더 비싸고, 예비부부의 자격으로 대출받는 건 없어서, 그녀의 대출은 그의 대출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 생각해 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다. 3일 안으로 연락을 주시거나 서류를 찾아가시고, 따로 연락 없으시면 기존에 제출하신 서류는 폐기하겠다고 했다.


3일이 지나고, 그는 오지 않았고, 그들이 제출했던 등본, 재직증명서 등등의 서류와 청첩장, 결혼식 견적서류들은 파쇄기에 넣어서 폐기했다.


그래, 그래도 숨겨놓은 자식보다는 숨겨놓은 빚... 이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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