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가 차갑다.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킨다. 물에 초록빛의 오로라가 일렁이고 있다. 유연한 초록빛의 비단이 애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재질의 초록색 부채가 펄럭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고개를 치켜든다. 나도 모르게 감탄한다. 오랜만이네. 나는 다시 눈밭에 누워서 온 하늘을 덮은 오로라가 일렁이는 것을 뚫어지게 본다.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는 고질병이 되어 버린, 머리가 조이는 듯한 두통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오히려 머리가 맑다. 눈의 시원하고 상쾌한 냄새, 꿉꿉하지만 생기 있는 흙냄새, 미세먼지 따위는 전혀 없는 것 같은 깨끗한 공기 결이 모두 느껴진다.
눈을 떠보니 익숙하고, 지겨운 내 자취방 천장이 보인다.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본다.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이다. 낮잠을 잤음에도 피곤한 기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나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공부할 것을 가방에 넣어서 집을 나선다. 식당에 도착하니 은우와 준서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나를 보더니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든다. 우리는 앉자마자 예과 시절의 추억 얘기를 시작한다.
“도훈이 얘 아직도 최유진 못 잊은 거 아니야?”
준서가 특유의 유쾌한 말투로 말한다.
“뭐래. 너나 이제 그만 수진이 좀 잊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참 재밌었는데, 예과 때는. 최유진은 내가 대학 와서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이자 첫사랑이다. 이제 막 20살이 된 1월 1일에, 술집에서 내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봤던 키가 작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여자애. 하지만 그 이후로 그 여자애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들어갔던 보드 동아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는 그 여자애가 맞나 확인하기 위해서,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그녀를 계속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그 여자애가 맞는 것 같았다. 동아리 개강 총회가 끝나고, 나는 그녀와 같이 앉기 위해서 붙어서 걸어갔다. 다행히 동아리 뒤풀이 자리에서 그녀는 나의 앞자리에 앉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4명의 어색한 침묵이 계속 됐다.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아리 집행부 선배였다.
“저희 한 명씩 자기소개할까요? 저는 컴퓨터 공학과 21학번 최준헌이라고 합니다.”
그를 시작으로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의예과 24학번 이도훈입니다.”
내 자기소개가 끝나자 다들 감탄한다.
갑자기 나에게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컴퓨터 공학과를 다닌다는 그 선배는, 마치 진행자의 역할을 맡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하게 질문해 댄다.
“와 그럼 수능 몇 개 틀리셨어요?”
“재수 없이 바로 온 건가? 수시예요 정시예요.”
“나중에 병원 차리면 싸게 해 주나요? 돈 많이 벌겠네. 부럽다.”
나는 다소 부담스러운 질문들에 꾸역꾸역 답해나간다.
우리는 이름과 나이처럼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본가가 어디인지, 기숙사 생활, 자취 생활, 과 생활 얘기들을 해나갔다. 그 여자애는 자신의 이름을 최유진이라고 소개했고, 그 이름은 인스타에서 자주 봤던 것이었다. 나는 확신이 들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약간은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선배와, 내 옆자리에 앉은 동갑 여자애가 화장실을 간다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내 앞자리에 앉은 여자애에게 같이 바람 좀 쐬자고 말하고서는 솔직하게 물었다.
“너 나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네가 나 인스타 땄잖아.”
그녀는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큰 소리로 웃고는 말했다.
“당연히 알지. 그거 알아? 내가 너 따라서 여기 동아리 들어온 거야. 너 스토리 보고 따라 들어온 거라고.”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크게 당황한다.
“그럼 그전에는 왜 연락 안 했는데?”
“그럼 재미없잖아. 너 내 연락 기다렸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또다시 웃었다. 웃는 게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리긴 무슨. 인스타 따놓고 연락이 안 오니까 어이없었던 거지.”
최대한 퉁명스러운 척 말했지만 내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간다. 결국에는 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터뜨렸다.
그날 이후로 유진이는 나에게 연락하는 일이 잦아졌다. 수업이 1시 30분에 끝나서 같이 밥을 먹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네가 같이 먹어 달라거나, 동아리에 친구가 없으니 같이 가자거나, 주로 무언가를 같이 하자는 식의 연락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겉으로는 마지못해 함께 하는 척했지만, 유진이와 함께 하는 것과, 유진이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거워했다.
어느덧 캠퍼스에는 개나리와 벚꽃들이 피워나기 시작했다. 벚꽃이 이제 막 핑크빛의 작은 꽃을 피워 내는 어느 날에, 유진이는 나에게 산책을 하자고 했다. 나는 빠르게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녀를 만나러 갔다. 나는 유진이를 보자마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리 움직이기가 불편하고 시린다면서 절대 안 입겠다던 치마와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파스텔 톤의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흰색 치마와 초록빛을 띠는 파스텔 색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놀라서 가만히 서 있자 그녀는 특유의 아무 걱정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다.
“왜 예쁘냐?”
눈을 뗄 수가 없다. 나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린다. 우리는 평소처럼 중앙 광장 벤치에 앉아서 여러 얘기를 해댄다. 시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은 필수 교양 수업의 교수 욕부터, 시험공부를 하기 싫다는 투정, 자신한테 들이댄다는 26살의 양심 없는 복학생 오빠 욕까지. 나는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응한다. 하지만 그녀는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너는 연애 안 해?”
유진이가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하고 싶지 나도. 근데 용기가 없다.”
유진이는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대신 용기 내줘? 나 너 좋아해 도훈아.”
심장이 빠르게 뛴다. 이렇게 뛰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유진이의 뒤에 있던 배경이 흐려지고, 유진이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 사귀자 도훈아.”
웃음이 새어 나온다. 불안해하며 바라보는 저 얼굴을, 웃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 내가 너 계속 웃게 해 줄게.”
그 말을 듣고 유진이는 해맑게 웃는다.
우리 커플은 의대와 유진이의 과인 국어국문학과 내에서 유명한 커플이었다. 우리 학교 축제는 물론이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 축제를 거의 다 함께 즐겼다. 축제에 온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서로 마주 보고, 가사를 따라 부르는 것이 우리의 취미였다. 그러고 있으면 마치 노래의 주인공이 우리가 된 것 같았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함께 했다. 함께 수업을 들었고, 함께 밥을 먹었고, 함께 공부했다. 동거를 하기로 결정한 2학기 때부터는 매일 함께 잠에 들었다. 나는 유진이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내 팔을 베고 잠든 유진이의 작은 숨소리를 숨죽여 들었다. 너의 숨결과 나의 숨결이 완전히 같아져서, 하나로 포개지길 바랐다.
“도훈아 무슨 생각해.”
은우가 나에게 묻는다.
“아니야 아무것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나는 하던 생각을 멈춘다. 또다시 머리가 아파 온다. 본과 생활에 대한 걱정을 토로하는 친구들 사이로 묵묵히 밥을 먹는다. 은우와 준서와 헤어지고 홀로 자취방으로 걸어간다. 왜 괜히 최유진 얘기를 해가지고.
유진이와는 2학년 1학기 여름 방학에 헤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격 차이. 우리는 달랐다. 무언가 대단한 것이 없었다. 정말 사소했다. 나는 채소를 싫어했고, 유진이는 채소를 좋아했다. 유진이는 변덕스러웠고, 나는 계획대로 행동하기를 원했다. 나는 친구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유진이는 그 점을 서운해했다. 나는 귀엽고 청순한 옷을 좋아했지만, 유진이는 어른스럽고, 힙한 스타일을 좋아했다. 유진이는 더러운 꼴을 못 보는 깔끔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어지럽혀진 방 속에서도 질서가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주 다퉜다. 나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여름 방학이 된 후에 처음 밖에서 데이트를 한 날. 나는 유진이에게 이별을 말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더운 날에 밖에서 데이트를 했으니.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유진이는 그 자리에서 꽤 오랫동안 울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유진이는 울음을 멈추고서 말없이 내 자취방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짐을 모두 챙기고서는 그 길로 떠났다.
“잘 지내.”
나는 우두커니 서서, 무언가가 부족해 보이는, 심지어는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자취방을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후,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가장 큰 변화는 자취방을 옮긴 것이다. 유진이와 함께 했던 모든 것(화장실, 싱크대, 유진이가 좋아하던 책상과 창문, 의자)을 보고 있으면, 깊은 그리움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후회하고 있다고, 너 없이는 못 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유진이와의 기억을 끊어 내기 위해서 이사를 했다.
또 다른 변화는 연애를 오래 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쉽게 사람을 만나고 쉽게 사람과 헤어졌다. 상대에게 어느 하나라도 맘에 들지 않는 점이 있으면, 통보하듯이 이별을 말했다. 깊은 사랑을 하면 항상 슬픈 마지막이 뒷따라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
정신이 든다. 눈이 뻐근하고 답답하다. 거울을 보니 눈물 자국이 있다. 알람이 울린다. 나는 시험 자료를 챙겨서 시험장으로 뛰어간다. 오늘은 ‘인체의 구조와 기능’이라는 과목의 시험을 보는 날이다. 다행히 시험이 시작하기 전에 강의실에 도착한다.
문득 의대에서는 어떤 고민이나 생각도 금방 그 생명력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험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곳곳에서 문제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어떻게든 답을 구하려고 머리를 짜내고, 기억을 되짚어 본다. 시험이 끝났다. 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끄집어내서 이제 더 이상 꺼낼 것이 없는 듯하다.
강의실에서 나가자 따뜻한 봄 햇빛이 나의 얼굴을 감싼다. 바람이 귀를 스치는 소리가 마치 문제지를 넘기는 소리 같다. 시험도 수업도 다 지긋지긋하다. 앞으로 3일 동안은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기쁘다.
얼마 뒤에, 시험 결과가 나왔다. 교수가 이메일로 성적을 보냈으니 확인하라고 한다.
내 불안과는 다르게 내 성적은 예상외로 상위권이다. 놀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던 은우와 준서는 한 과목씩 만점이었고 다른 과목은 한 두 개 정도 틀렸다고 말한다. 시험의 결과가 나오자 강의실이 어수선해진다. 교수가 각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을 호명한다.
만점을 받은 그들은 강의실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박수 소리는 형식적이고 작게 들린다. 이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이 강의실을 빠져나온다. 캠퍼스를 하염없이 걷는다. 시원한 봄바람을 조금 쐬면 생각이 정리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하나씩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떠오른 수많은 생각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얽히고설킨다.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걱정이 되고, 불안하고, 슬픈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함께 버틸 줄 알았던 의대 본과 생활은, 현실에는 없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뒤에서 까기 바빴고,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들에게 시기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의 집합소이다. 인생에서 한 번도 뒤쳐져본 적이 없었을 그들은, 반드시 자신이 우위에 서야 마음이 편한 듯했다.
나는 회색빛 황사가 낀 거리를 걷고, 걷고, 걷는다. 아무리 걸으면서 생각해 봐도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냥 별 걱정 없이, 별생각 없이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자취방에 들어오자마자 씻고 난 후에 오늘 수업 내용을 복습한다. 곧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 대신 인체의 수많은 조직들의 이름과, 인류가 걸려 왔고 발견한 수많은 병균,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병들,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법들로 가득 찬다.
생각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나는 기꺼이 학습하는 로봇이 되고자 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현재 삶에 대한 불만족감, 부모와 동기들을 원망하는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나는 자취방을 벗어나서 학교 앞에 있는 번화가를 걷는다. 아주 높고 화려한 건물들과는 대비되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괴로워진다. 길가의 광고판이 눈에 띈다. "성공을 향한 당신의 길, 그것만이 정답입니다." 대기업의 광고 문구였다.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결국 크게 터뜨린다. 웃기다. 참 웃긴 말인 것 같다.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
본과 2학년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봤다. 작은 쪽지 시험부터 수업 자료가 4000페이지가 넘는 양의 시험까지.
나는 공부하는 로봇이었다. 매 시간 수업에 늦지 않고 참석했고,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빠진 동기가 수업 내용에 대해서 질문하면, 단체 메신저 방에는 어떠한 답도 없었다. 다들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숨기려고 했고, 고등학생 때 기대했던 협력과 소속감 따위는 없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은 거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려고 했고, 독종이라면서 자기들끼리 뒷말을 해댔다.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는 그 내용을 복습했고, 실습수업의 경우에는 영상 자료를 찾아보면서 수업 내용을 머리로 복기했다.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매일 독서실에서 4000페이지의 출력물을 읽고 외우려고 노력했다. 외로웠고, 고독했다. 동기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며 토로했고, 유급을 하는 학생도 생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는 그 상황에서 나까지 그것에 가세하기 싫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3학년부터는 병원 실습을 돌았다. 의대 교수가 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옆에서 보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진료하고, 약을 처방하고, 의료 처치를 하고.
의사가 어떻게 간호사들과 함께 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배웠다. 수술실에 들어가서 직접 수술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일찍 일어났고, 많이 배웠고, 지쳤었다. 의대 교수들에게 정신 못 차리냐는 쓴소리를 들을 때에는 약간은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는 했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니만큼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됐다. 나는 내 실수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생명을 손에 짊어진 삶이 부담스럽고 무서웠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고생도 익숙해지니 덜 힘든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에는 피부과를 가지 못했다. 나보다 성적이 높은 학생들이 먼저 과를 선택한 후에는, 피부과는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 동기들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았던 태민이는 혈액종양내과를 선택했다. 태민이다웠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태민이는 혈액종양내과에 가서, 자신이 백혈병 치료를 받을 때를 생각하면서 환자를 대할 것이다.
나는 매번 태민이 같은 사람이, 생명을 다루는 숭고한 직업인 의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동기들은 태민이가 혈액종양내과를 선택할 거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태민이의 선택에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었다. 덕분에 자신이 원하는 과를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빈이후과를 선택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내 성적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인기과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모에게 이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들의 반응이 상상이 갔다.
나는 결국 의대 졸업식 날이 되어서야 부모에게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과를 털어놨다. 아직도 그때 그 부모들의 눈빛이 기억난다.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 경멸이 가득 찬 눈빛. 이제는 어떠한 기대도 없는 듯한 텅 빈 눈동자들.
축하받고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찬 졸업생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였다. 홀로 그 고통스러운 눈빛들을 견뎌내고 있었다.
나는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유일한 탈출구는 꿈이었다. 꿈에서만큼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생활했다. 소설가가 된 태우처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의 내용을 글로 써서 조금 더 생생히 기억하고 싶었고, 글을 씀으로써 다시 그 꿈을 상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글을 쓰기는커녕 밀린 잠을 몰아 자느라 휴일을 다 썼고, 휴일 늦은 오후에 일어난 뒤에는 가만히 누워서 다시 잠에 들려고 노력했다. 꿈을 꾸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날부터는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잠을 더 오래 자보려고 퇴근하자마자 바로 침대에 누워서 잠든 적이 있었다. 그래도 꿈은 꾸지 않았다. 꿈은 나에게 탈출구였다.
꿈을 꾸지 않을 때면 현실을 온전히 견뎌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천국을 경험한 뒤의 겪는 지옥은,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자마자 침대에 쓰러진다. 생각을 비우고 잠에 들려고 노력한다. 계속 눈이 감겨 오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생각을 비우려고 머리 뒤쪽에 힘을 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본다. 새벽 4시. 출근까지는 3시간 남았다. 머리가 아파 온다.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간다. 식탁 위에 ‘졸피뎀’이라고 적힌 통이 있다. 나는 그 통이 마치 나를 천국에 데려다주는 아주 귀중한, 입장권처럼 보인다. 나는 입이 꽉 찰 때까지 통 안의 알들을 털어 넣는다. 입안이 약들로 가득 차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약이 입 속의 침으로 인해서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알약 특유의 역하고 쓴 맛이 난다. 나는 결국 입안에 있는 약들을 모두 뱉어낸다. 그 약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한다. 역하다. 화장실로 뛰어간다. 저녁에 먹은 모든 것들을, 아니, 나의 모든 것들을 토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