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면서도 서늘한 바람이 내 얼굴을 감싸며 지나간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겨울바람 냄새가 난다. 왠지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해야만 할 것 같은 날이다.
지하철 역에는 사람이 붐비고 있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핸드폰만을 들여다보는 그들을 보며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낀다. 나는 지하철 탑승구로 간다.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문이 열리자 열차에 탄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몇몇 사람들이 잽싸게 열차에 타고는 자리에 앉는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그들을 경멸의 눈빛으로, 또 일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이 무관심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나는 지하철에 타서 안전봉을 잡고 목적지로 향한다.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시선을 두고 무표정으로 서 있거나 앉아 있다. 대화를 나누는 몇몇의 목소리만이 열차 칸 안에서 울린다.
이번 역은 한국대, 한국대 역입니다.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몸 어느 한쪽이 약하게 저려오는 듯한 느낌도 든다. 문이 열리자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서 1번 출구로 나간다. 캠퍼스 안에는 사람이 꽤 많다. 다들 어딘가 희망에 찬 표정이다. 나는 단체 메신저 방에 올라온 지도를 보고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지점으로 간다.
캠퍼스 건물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들은 매끈한 재질로 만든 것 같다. 깔끔하고 깨끗해 보이는 건물 안에서 왠지 미래를 책임질 신약을 만들고 있거나, 혼자 움직일 수 있는 로봇을 만들 것만 같다. 저 건물은 무엇을 하는 곳일지 호기심이 생긴다. 반대로 꽤 오래되어 보이는 듯한 건물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게 하는 벽돌 건물이다. 왠지 모를 웅장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시계를 보니 모이기로 한 시간까지 5분 남짓 남았다. 나는 지도를 보고 뛰어간다.
아직 앳된 얼굴들이 모여서 서로의 이름과 나이를 묻고 있다. 나도 저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저 멀리서 꽤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다가간다. 가까이 갈수록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가 나를 보고는 내 이름을 부른다. 저 사람도 나를 알고 있었나.
“도훈아 너 한국대 의대 붙었어? 여기서 다 만나네.”
그는 자신을 은우라고 소개했다. 최은우. 아 기억났다. 대치동 현장 강의를 같이 들었던 그 꼬맹이. 그때 당시에는 둘 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같이 수업을 들은 뒤에 꼭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이나 와플을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수고했어. 이제 즐길 일만 남았어.”
은우의 말에 괜히 불안해진다. 정말 즐길 일만 남았을까. 그렇게 근황과 추억이 뒤섞인 대화를 하던 중에 과잠을 입은 사람이 자신을 학생회장이라고 소개하고는 우리 보고 2줄로 서 달라고 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은우의 옆에 선다. 우리는 학생회장의 안내를 따라서 버스에 탄다. 설레기 시작한다.
왜 처음인 모든 것들은 설레는 것일까.
우리는 버스를 타서 서울의 대도시와 논밭들을 지나고, 결국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는, 마치 아비스코처럼 순록이 뛰어다닐 것만 같은 곳에 도래한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 강원도야. 의예과 공지방에 올라와 있던데?”
나는 창문으로 눈에 싸인 풍경을 보면서 아비스코의 추억을 떠올린다. 오로라와 눈, 얼음, 따뜻한 순록 수프와 크리스마스트리로 꾸며진 그 아비스코. 언젠가 한 번쯤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버스는 리조트로 보이는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주차장에 멈춘다. 우리는 또다시 학생회장을 따라간다. 바닥에 있는 눈을 뭉쳐서 던져 보기도 하고 괜히 발로 눈을 차보기도 한다. 리조트는 크리스마스를 분위기를 내는 조명들로 예쁘게 꾸며져 있다.
과잠 선배가 공지방을 확인해 달라고 한다. 남자 여자 별로 8명씩 같은 리조트 호실로 배정되어 있다. 우리는 함께 방으로 간다. 방에 들어와서 짐을 풀고 거실에 모여 앉는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이어진다. 푸근한 느낌이 드는, 누군가 무례한 짓을 해도 웃어넘길 것만 같이 생긴 남성분이 그 침묵을 깬다.
“우리 자기소개라도 할까요?”
한 명씩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고서는 또다시 침묵. 이번에는 볼살이 포동포동하고 눈이 째진, 마치 시샘 많은 뚱뚱한 고양이처럼 생긴 남자분이 침묵을 깬다. 우리는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물으면서 알아가기 시작한다.
핸드폰을 보던, 자신을 준서라고 소개한 남자가 대강당으로 모이라는 공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겉옷을 챙겨서 대강당으로 간다. 대강당에는 무언가 분주해 보이는, 선배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함께 tv 예능에서만 봤던 다양한 게임들을 한다.
서로의 몸짓에 웃음이 터지고, 1등 팀 상품이 양주라는 것에 환호하고, 별것도 아닌 것에 진심으로 참여한다는 것에 웃기다.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가 목까지 차올랐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한 선배가 목도리도마뱀을 표현하다가 넘어진다. 웃기게 발을 위로 올린 채로 말이다. 잠시 동안 대강당실은 우리들의 밝은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우리는 레크리에이션이 끝나고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고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됐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같은 조로 묶인 애들 대부분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린다. 술에 힘 덕분인지 누가 시작이랄 것이 없이 자신의 연애사, 힘들었던 수험 생활, 기대되는 대학 생활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한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정신이 없고, 혀가 꼬인다.
우리는 밤새도록 떠들다가 결국 해가 뜨는 것을 본다. 피곤하지만 왠지 더 놀 수 있을 것만 같다.
잔뜩 어지러워진 술자리를 정리한 뒤에 우리는 버스를 탄다. 버스는 승객을 아무도 태우지 않은 것처럼 조용하다. 다들 뻗어 있는 듯하다. 나는 뒤를 돌아서 그 모습을 쳐다본다. 동기 몇몇이 입을 힘껏 벌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서 숨죽여 웃는다. 나는 눈이 가득 쌓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미소가 지어진다.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나는 자세를 더욱 편하게 고쳐 눕는다. 곧 무언가가 코를 간지럽힌다. 재채기를 연거푸 3번을 한다. 눈을 떠 보니 가을의 색을 한껏 머금은 광활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다. 입이 떡 벌어진다.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을 보고 있으니 차분해진다. 갈대가 흔들릴 때마다 갈대의 고소하고 생긋한 풀 냄새가 내 콧속으로 들어온다. 평화롭다. 해가 산 너머로 천천히 지고 있다. 갈대 사이사이로 비치는 붉은 햇빛이 갈대를 물들인다. 지고 있는 태양은 평소보다 크기가 훨씬 커 보인다. 자세히 보니 태양이 자신의 근처에 붉고 둥그런 빛의 원을 만들었다.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에 지금 이 순간이 현실 같지 않다. 잠깐만 이게 정말 현실이 맞나. 진짜 맞는 건가.
꿈이 맞았다. 어깨와 등, 허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이 힘들다. 배에서부터 끓어 올린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일어 난다. 열람실을 둘러보니 옆자리에는 의대 동기인 태민이가 있고 내 왼쪽 가장 구석에 있는 책상에는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분이 한 명 있다. 안경을 끼고, 옆에는 카페인 음료를 잔뜩 쌓아둔 채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하...
또다시 한숨을 쉰다. 최근 들어서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고3 수능 일주일 전에 마지막으로 꿈을 꾼 이후로, 성인이 되어서는 최근 들어서 처음 꿈을 꾸었다.
나는 의대에 붙은 후 정신없이 놀았다. 예과 1, 2학년 때에는 기초 교양과 전공 수업 몇 개만을 필수로 듣고, 과를 선택하는데 예과 때의 학점이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내일 없이 놀았다. 한 번 술을 마시면 반드시 다음 날에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며 해장을 해야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의대생이라는 학벌과 내 준수한 외모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뜨거운 사랑도, 상대에게 금방 흥미를 잃고 관계를 끝내는 시들한 사랑도, 단순히 잠을 자기 위해 하는 사랑(이걸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도 했다. 내가 상처를 받기보다는 먼저 상처를 주고 떠났고,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면서 살았다. 예과 생활은 내가 바랐던 대로 자유로웠다. 의대 동기들 중의 몇몇은 그동안 고생했던 나날들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수업을 밥 먹듯이 빼고 놀러 다녔다. 나는 그들과 어울렸고, 나와 그들은 잘 맞았다. 수업을 갈지 말지와 같은 사소한 것부터 여자친구와 어디를 갈지, 자취를 할지 통학을 할지, 술은 얼마나 마실 거고 언제 집에 들어갈 건지,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와 같은 매우 중요한(나에게는 중요한) 일도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에 책임도 온전히 내가 져야 했다. 자유로워지면서, 모순적이게도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졌다.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을 수강 신청으로 직접 잡아야 했다. 그 수업을 잡지 못했을 경우에는 거리가 먼 강의실을 왔다 갔다 하거나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고, 성격이 괴팍하거나 과제를 많이 내주는 교수를 만났을 때도 있었다. 밤새서 술을 마신 다음 날에는 수업에 늦거나 결석을 하여서 마주하게 되는, 교수님의 따가운 시선과 낮은 학점을 견뎌 내야 했다. 자취를 결심한 날부터 1주일에 한 번씩 빨래를 하러 빨래방에 갔고, 화장실 하수구에 낀 머리카락을,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구역질을 연거푸 해대면서 빼내야 했다.
내가 바랐던 자유가 생각처럼 마냥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게 해 줬다. 평생을 부모에게 조종당하듯이 살아왔던 나에게는 자유는 낙원이었고 천국이었다.
하지만 그 낙원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모는 내가 예과 2학년 여름 방학에 본과에서 배울 내용을 미리 복습하라고 했다. 본과에 올라가서 좋은 성적을 거둔 뒤에 인기과인 피부과에 가서 돈을 쓸어 담으라고 했다. 그리고 항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결국 행복이고, 전부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나의 미래를 설계했다.
나는 그들을 따르기 싫었다. 설령 그들의 말이 옳은 것일지라도 따르기 싫었다. 내가 마치 인형극의 인형이 되는 기분이었고,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에는 부모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금전적 지원을 해주는 것은 부모였고, 딱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어렸을 때부터 수학 과외를 받았고, 영어 유치원을 다녔다. 남들 다 한 번쯤은 다닌다는 태권도 학원이나 피아노 학원도 가본 적이 없다. 오로지 대학 입시에서 남들보다 앞서기 위한 노력만을 해왔을 뿐이다. 다양한 경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시간도 없었다.
대학에 와서는 그 힘든 시간을 보상받으려고 정신없이 놀기만 했기 때문에 내가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부모의 말을 따르면서도 점차 내 인생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꼈다. 나는 위안을 다른 곳에서 찾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변호사를 하겠다는 선배, 소설가를 하고 싶지만 현실적 제약 때문에 회계사를 준비한다는 친구,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대기업에 취업하겠다는 선배. 하고 싶은 일이 없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래도 내가 돈은 많이 벌 수 있다며. 다 그렇게 사는데, 다 힘들게 사는데,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나는 돈이라도 많이 버니까 행복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
거칠게 의자 끄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책을 뚫어지게 보던 태민이가 일어나서 가방을 챙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머리가 아프다. 마치 내 머리통보다 훨씬 작은 목걸이를 머리에 오랫동안 낀 것 같이 아프다.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동기를 따라나선다. 태민이는 내가 집중을 못하고 자신을 따라 나올 것을 알았는지, 열람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중앙 광장에서 잠깐 머리 좀 시키자”
중앙 광장은 우리 학교에 있는 잔디밭으로 학교에서 젤 예쁜 건물이 바로 앞에 있어서 학교 내에서는 유명한 피크닉 장소이다. 나는 오랜만에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최근에 술 때문에 간이 안 좋아졌기도 하고, 곧 시험이기 때문에 참기로 한다.
“나 내일 아침에 약속 있어서 음료 마실게”
의대생이 술 때문에 간 건강이 나쁘다고 말하면 웃기게 들릴까 봐 태민이에게는 대충 둘러댄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각자 마실 것을 사고 중앙 광장으로 향한다. 벚꽃이 지기 시작한 봄밤의 공기가 맑고 상쾌해서 웃음이 절로 난다. 시험 기간이어서 그런지 날씨가 좋음에도 사람이 많지 않다. 중앙 광장에는 우리와, 커플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나와 태민이는 벤치에 앉는다. 나는 문득 태민이가 어떻게 이런 늦은 시간까지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생각해 보면 태민이는 나와 달리, 예과 때부터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의학과 관련한 학회 활동도 했고, 의료 봉사도 가끔씩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태민아 너는 정말 의사가 하고 싶어서 온 거야? 너처럼 나도 열정적으로 공부해야 원하는 과를 갈 수 있을 텐데..”
태민이는 눈동자를 빛내면서 말한다.
“응 나는 의사가 꼭 되고 싶어. 사실 중학교 3년 동안 백혈병을 앓았어. 초등학생일 때,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에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고 숨도 차고 탈진한 것 같더라고.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봤는데 백혈병 진단을 받았어. 항암 치료하면서 머리도 많이 빠지고,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매일 먹은 것을 다 토해냈어. 나는 토하는 느낌도, 토하고 난 뒤에 목이 아픈 것도, 내 척추에 마취 없이 꽂아 넣는 주사의 느낌도 싫었어.”
나는 처음 듣는 태민이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늘 열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밝다고만 생각했던 태민이에게 그런 아픈 과거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조용히 듣고만 있는다.
“그때 날 담당 해주셨던 주치의 선생님이 많은 힘이 되어 주셨어. 내가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희망을 주셨고 믿음을 주셨어. 결국에 나는 잘 이겨내고 지금처럼 건강해질 수 있었어. 그래서 나도 그분처럼 환자의 병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치유해 줄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어.”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듣고 공감을 잘 못하는 나임에도, 태민이의 얘기를 듣다 보니 절로 눈물이 났다. 태민이는 내 눈물샘을 터뜨리려고 작정을 했는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난 의사가 되어서 환자를 살리고 싶어.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말이야. 나는 정말 그러고 싶어.”
“대단하고, 부럽다.”
나도 모르게 작게 튀어나온 말이다. 태민이는 그 말을 듣고서는 묻는다.
“왜 부러운데?”
“난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거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좋은데, 또 의사가 엄청 되고 싶은 것은 아니야. 너처럼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열정이 있을 텐데.”
태민이는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다.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 지금부터라도 찾아봐.”
나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다.
“늦었다. 이제 집 가자!”
나는 태민이와 헤어지고는 홀로 자취방에 걸어간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내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왠지 답답하고, 슬프다. 막연한 미래가 두렵기도 하다. 나는 학교를 벗어나서 자취방이 있는 거리에 도달한다. 매일 보는 자취방 앞 거리가 오늘따라 을씨년스럽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거리 곳곳에서 무언가 무서운 것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두렵기까지 하다. 나는 뛰어서 자취방 건물에 도착한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자취방 문을 열고는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오랫동안 뒤척이면서 잠을 자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상상을 수십 번을 반복하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른 채로 잠에 빠져 든다.
오늘부터 지옥 같은 시험이 시작이다. 사실 매주 월요일에 시험 1개를 보고 일주일에 적으면 1개, 많으면 3개씩 보기 때문에, 학기 전체가 시험 기간이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일주일에 시험은 3개 이상씩 보는 기간이다. 의대 본과 생활은 시험, 시험, 시험, 시험 그리고 시험이다. 입시가 끝나면 시험 같은 건 안 보고, 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때보다 공부할 양이 배로는 많다. 게다가 매주 고등학교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양의 시험을 본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더 공부해야 할 양은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고, 매일 공부에 쫓기며 살아간다. 생각 없이 놀던 예과 때가 그립기만 하다.
씻지도 못하고 시험을 보는 강의실로 뛰어간다. 밤을 새워서 그런지 발을 디딜 때마다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럽다. 강의실에 들어 가자 모두가 시험 자료만 보고 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병리학 시험은 돌아다니면서 몇 초 남짓한 시간 안에 현미경으로 세포의 모습을 보고는 이 세포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병명을 쓰는 시험이다. 나는 가운을 입고 내가 시험을 시작할 자리로 간다. 3번째 현미경까지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병이다. 나는 남들 보라는 듯이 자신 있게 병명을 써낸다. 4번째 현미경을 본다. 어디선가 많이 본 세포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병명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현미경이 떨린다. 현미경을 잡고 있는 내 손이 떨리기 때문이다. 초조하다. 다음 현미경으로 넘어가라는 교수의 종소리가 마치 내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린다. 땡. 다음 차례의 학생이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른 현미경으로 이동한다. 5번째 현미경. 이게 뭐지. “무슨 병이지?” 6번째 현미경. 이번에도 어디선가 본 듯하다. 하지만 또다시 병명이 기억나지 않는다. 7번째 현미경부터 10번째 현미경까지는 아는 병이다. 나는 안도하며 답안지에 병명을 쓴다. 시험 시간이 끝나자, 조교가 답안지를 제출하라고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답안지를 낸다. 자괴감이 든다. 고등학교 때는 답안지를 절대 빈칸으로 낸 적이 없는데.
최근 태민이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 차서, 잠을 못 잤다. 차라리 고민하고 생각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했어야 했다.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답안지와 문제지를 모두 제출하고 확인이 끝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나가기 시작한다.
예과 때부터 함께 미친 듯이 놀았던 은우가 나에게 다가온다.
“도훈 너 시험 잘 봤냐? 아니 그 중간에 4번째 현미경인가 5번째 현미경인가 그거 기억 안 나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썼어. 근데 시험 끝나니까 이름 다시 까먹었네.”
은우 특유의 밝고 헤실헤실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한다.
“난 그거 빈칸으로 냈어. 몰라서.”
“그래? 담에 잘 보면 되지. 시험도 끝났는데 밥이나 먹자. 머리도 식힐 겸.”
내가 못 쓴 답을 쓴 은우에게 경쟁심이 생긴 건지 왠지 그와 얘기하기가 싫어진다.
“아 나 다음 시험 준비 해야 해서 그냥 집 가서 빨리 먹으려고. 좀 있다가 저녁 같이 먹자.”
은우는 아쉬운 표정으로 알겠다고 말하며 강의실을 나간다.
시험을 보고 난 뒤에 이 정도로 불안했던 적이 없다. 그동안 1등 만을 바라봤던 나에게 뒤처진다는 느낌은, 큰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왔다.
이제는 깨달았다. 나에게는 지금 좋아하는 것을 찾을 여유 따윈 없다. 계속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서 성적이 안 좋게 나온다면, 성적 경쟁과 점수 관리에 미친 이 의대생들 사이에서는 낙오될 수밖에 없다. 잘못하면 유급해서 이 지옥 같은 일을 1년 더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 안정적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의사가 되고 나서,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봐도 늦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는 이유로 의사라는 직업을 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현실감 없는 말이다. 누군가가 이 말을 듣는다면, 100의 99는 미친 소리라고 하겠지.
나는 편의점에 들러서 김밥을 사고는 자취방으로 간다. 한 손으로는 김밥을 먹으면서 한 손으로는 바로 다음 교시에 시험을 보는 생화학 과목의 교재를 넘긴다. 집중하다 보니 2시 30분이다. 시험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았다. 나는 정리 노트를 챙겨서 시험을 보는 강의실로 간다. 역시나 강의실은 꽉 차 있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와서 남은 자리에 앉는다. 시험이 시작되자 모두 자신의 앞에 있는 문제지를 뒤집고서는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나는 평소 자신 있던 과목이기에 망설임 없이 답안지를 채워나간다. 마지막 문제를 풀면서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1시간이나 지나 있다. 마지막 문제를 거의 다 풀었음에도 ‘10분’이라는 시간이 괜히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모든 문제를 다 풀고 시계를 보니 6분이 남아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나는 막혔던 문제로 돌아가서 풀이 과정에서 오류는 없는지 확인한다. 시험 시간이 끝났다. 또다시 문제지와 답안지를 확인한다. 확인이 끝났다는 말을 하자마자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강의실을 벗어난다. 은우에게 전화를 건다.
“좀 있다가 저녁 먹자 준서도 불러. 같이 먹게.”
“좋지. 너 지금 어딘데?”
“나 이제 시험 끝났는데 집 가서 자고 올게. 밤새니까 죽겠다.”
“오케이.”
문득 준서도 생화학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분명 생화학 수업 시험장에 있었을 것이다. 이걸 까먹을 수가 있나. 밤을 새우니까 진짜 바보가 된 기분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알람을 맞추고 침대에 눕는다. 옷을 벗을 정신도 없이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