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이승은 어떤 의미였을까?
전후 일본사회를 살아온 미야자키 하야오는 분명 그 시대에 대한 통찰을 어떻게든 작품 속에 담아내려 한다. 군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조롱, 리얼리즘은 잠깐 차치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주인공 마히토에게 저승은 정처 모를 노스탤지어의 대상이다. 전쟁, 엄마의 죽음을 겪은 마히토는 애답지 않게 늘상 조용하고 진중한 성격.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재혼한)이모가 아무리 잘 챙겨준다한들 유년기에 엄마를 잃은 소년에게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모성은 언제나 그리운 대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 사후 오랜만에 찾은 외갓집은 단순히 전쟁의 상흔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도 어쩌면 엄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기억과 기회의 장소다.
심지어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이한 일의 연속과 왜가리의 등장,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것 같은 공간, 엄마와 이모를 거슬러 외할아버지의 비밀이 담긴 외갓집에서 마히토는 애타게 그 흔적을 찾아 헤맨다.
(강스포 주의)
스토리 후반부, 기묘한 세상을 함께 하던 모험친구 “히미”의 정체는 사실 엄마의 어린시절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세계를 떠받치는 지도자는 사실 혈족 큰할아버지였음이 밝혀진다. 노쇠한 할아버지의 세상은 후계자가 필요했고, 그런 할아버지가 히미와 마히토를 이세계로 불러들이면서 혼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렇게 저승에서 이모(엄마)를 구하고 돌아가려 함은 오르페우스 신화와 닮아있다.
오르페우스는 다만 비현실적으로 이미 죽은 아내를 데려오려고 하다 금기를 어겨 구조에 실패한다.
그러나 마히토와 히미는 엄마의(본인의) 인생을 후회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널 낳은 건 가장 잘한 일이야.”라고 말해주는 히미(엄마).
히미는 본인이 여기를 나가서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알지라도 성장하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삶을 택한다.
마히토 또한 나가서 전쟁을 맞이하고, 푸닥거리하는 동급생들, 다시는 볼 수 없는 엄마, 복잡한 가정상황을 맞이하는 걸 알아도 동생을 임신한 이모를 데리고 현실의 삶으로 돌아간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에 성공하고, 안전하게 돌아온 것이 아닐까.
마히토의 결정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답이다.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그라고 도피의 세계.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우습게도 엄마와 아들은 닮았다.
마히토는 곧 불바다가 될지라도(도쿄 대공습) 이승을 택하고 돌아가려 한다. 엄마랑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도, 이승으로 돌아가 친구를 만들겠다고 한다.
화재로 일찍 죽을 걸 알아도, 아이를 낳는 것은 멋진 일이라며 살아보겠다고 이승으로 떠나는 히미.
도쿄가 불바다가 될 걸 알아도, 친구를 만들면 된다며 떠나는 히미의 아들 마히토.
결국 할아버지의 이세계로, 또는 저승으로 도피하기보다 히미도 마히토도 그 결과를 알더라손 현실로, 이승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을 내린다.
(히미와 마히토가 일그러지는 시간의 다리를 달리는 장면은 시간을 접어달린다는 1962년 작 <시간의 주름>을 연상케 한다.)
도피를 외면하고 현실로 당차게 떠나는 순간 증조부의 세계는 무너지며, 증조부 또한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들의 이별은 참으로 담담하다.
왜가리는 “잘 있어라, 토모다찌”라는 말과 함께 사라지고,
히미와 마히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비로소 성장한다.
고통스럽더라도 세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성장은 시작된다. 돌아온 현실은 녹록치 않을 것이며, 돌아왔다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것이 노익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하는 이승의 가치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하루하루 고찰할 때 좋은 근거가 되리라 믿는다.
올해 5월 17일에 본 영화. 감상평을 산발적으로 적어놨길래 좀 정리해서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