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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152] 미술상과 경매의 시작(1)

'그 시절 갤러리', 대부업체였다고?

by HR

광화문 세종대로 152에서 근무 중입니다.

근현대기 한국의 문화예술 이야기를 나눕니다.


미술상과 경매의 시작(1)

: 이 시리즈는 한국 근대 미술상(아트 딜러)와 경매시장 형성 과정을 본인의 석사학위논문을 풀어가면서 적습니다. 상세한 인용은 논문을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https://m.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1f66704d337a7d07ffe0bdc3ef48d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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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유통과 대부업-'그 시절 갤러리', 대부업체였다고?


미술시장의 특수성은 미술품이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인 동시에, 환전 가치가 있어 ‘값을 매길 수 있는’ 데에 있다. 돈으로 치환되는 미술품. 우리 미술품 유통 역사의 흑역사는 ‘검은 손’으로 명명되는 대부업(대금업)과의 연관성에 기인한다. 사실 역사는 아니고 현재진행형일 수도 있다… 모 옥션의 반기보고서를 찾아보면 ‘영업개황’에 미술품의 경매사업, 판매사업, 중개사업, 그리고 “담보 대출업”을 시행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미술품 거래시장은 고려시대 때부터 형성돼 있을 거란 추정이 많다. 개성의 야다리, 즉 만부교 좌우로 송대 자기를 취급하는 점포가 즐비했다고 하며, 종로구 수송동의 정두환 서화포, 대안동의 김유탁이 운영하는 수암서화관, 최영년이 세운 한성서화관, 동화화랑 등이 대표적인 상업화랑들이다. 19세기 한반도에서 시작한 미술품경매업은 에도시대부터 발전한 일본의 미술품거래업과 유럽식이 짬뽕된 독특한 형태로, 시대에 따라 일본식과 유럽식 중 어떤 면모가 더 부각되는가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cf) [야다리=만부교] 공식은 여러 문헌을 종합한 결과다. 고미술상 황규동이 1970년대에 남긴 회고록에는 ‘개성 야다리’라고 적혀 있는데,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약대(낙타)를 매 놓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야다리”라고 명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야다리를 야교, 또는 낙타교라 불렀다.


일본의 미술품 거래에 대해 짚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데, 에도 말기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경제가 팽창하고 일본 중산층 사이에서 미술품 거래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미술협회의 전신인 용지회(류치카이, 龍池會)와 같은 미술상인조합이 발달하고, 상인들 간 입찰회가 증가했다. 청일전쟁 직후 상당한 인구의 일본인들이 제2의 삶을 꿈꾸며 한반도로 이민하게 되는데, 보통 인천 등 항구 위주로 들어오게 된다. 19세기 말은 새로운 문물이 그 어떤 규제도 없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던 시기다. 19세기 후반의 인천만 해도 서양인들, 화상(화교상인)들, 일본인들이 넘쳐났다.

인천.jpg 1930년대 인천 본정통 모습. 사진 오른편에 일본 제1은행이 보이며 중앙쪽에 제58은행 지붕과 그 앞에 제18은행 지붕이 보인다. /인천 한중문화관 제공


초기 고미술상(아트딜러) 중 하나로 분류되는 타카기 토쿠야(高木 德彌, 1863-?)는 17세 때인 1895년 3월 10일, 무일푼으로 인천에 도착해 본정 2정목 파출소 부근에 한 집을 빌려 대부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대부업이 실패하고 동업자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 그는 ‘이거라도 팔아야겠다’ 싶었는지 담보로 잡았던 골동품을 판매하기 위해 조선인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든, 외국인이든 조선의 골동품을 대부업체에 맡기고 현금을 찾아가는 구조가 있었다는 소리다.


이때부터 타카기의 인생은 조금씩 피기 시작하는데, 점차 고려자기와 중국의 기물을 매매하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방문해 어린아이를 시켜 그 집 주인을 통해 물건을 내놓게 했다. 본디 조선의 집안 살림은 여성이 맡는 법, 외간 일본 남자랑 말 섞이 싫어하는 조선 여성들에게 동네 어린 아이들을 시켜 “저 아저씨가 집에 물건 내놓을 게 없냐고 묻는데요 아주머니?”하고 묻는 식이었다. 특히 인기가 많았던 백자는 양반집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가회동, 재동과 같은 오래된 양반 동네를 위주로 수집했다.


타카기는 또 기막힌 회고를 내놓는다. 바로 ‘승선 거래’다. 그는 외국 영사와의 친분이 있어서 종종 군함으로 초대를 받아 물건을 판매했다고 기술한다. '카스테라'나 '짬뽕'으로 유명한 나가사키는 일본이 외국교류를 최초로 시작한 항구도시다. 조선에 오기 전 나가사키에 살던 그는 10대 시절 나가사키에서 견습상인으로 근무하며 정박한 외국 상선이나 군함에 미술품을 들고 올라가 선원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판매하는 선상 영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형태의 영업은 19세기 후반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장에서 진행된 ‘거류지 무역’으로 분류된다.


앞서 골동품을 대부업체에 맡기고 현금을 빌려가는 대부업이 성행했다고 언급했다. ‘전당포’다. 당시는 골동품이라는 명칭보다 ‘고물’, ‘고동품’이라고들 많이 했는데,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 시기에는 중고거래가 일상적이었고 이미 전당포 유통망이 사회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의 경찰관리 영업소 통계에 따르면 고물(고동품) 경매소는 1908년과 1909년 전국에 10여개 안팎이다가 1919년 20개(조선인 2개, 일본인 18개)로, 1929년에는 36개(조선인 10개, 일본인 25개, 외국인 1개)로 빠르게 증가한다.


고종은 심지어 1895년 ‘고물상 취체에 관한 제령시행규칙 또는 질옥체취법’을 제정하고 1898년 11월 ‘전당포 규칙’을 발표한다. 심지어 19세기 말 거류 일본인 10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리대금업이나 전당포가 2-3개 존재했다고 한다. 담보물의 처분을 위해서라도 감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렇게 감식안을 갖춘 전문적인 구조를 낳음으로 담보물에 대한 가치평가와 미적 기준이 정립돼 갔다.


1904년 요시쿠라 본노오가 발간한 <기업안내 실리지조선>은 일본인이 조선에 진출해 성공할만한 업종을 소개하는데, 여기에 유망업종으로 고물상이 당당하게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도기 및 불상이 많은데 가격도 저렴하다. 대다수가 땅 속에서 또는 사찰에서 많이 발견된다. 일본이나 구미로 수출하면 큰 이문이 남는다. (...) 이것을 매수하는 데 앞잡이 역의 한국인을 이용하는 능수능란한 수법이 필요할 때도 있다. 또 자신이 고사(옛 사찰), 고총(옛 무덤), 고적(옛 유적지)을 심방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 업에 정통하면 상당한 사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1890년대 일본인들이 대거 진출했던 대부업이 몰락하면서, 사대부 계층으로부터 담보로 잡아두었던 골동품을 매도하던 것이 골동품 거래업, 미술품 거래업으로 발전한 것이다.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 자본가들의 수집열과 맞물려 거래업이 더욱 성행했고, 고미술업으로 본격적으로 이행하면서 일본식 제도가 조선에 이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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