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광화문 세종대로 152에서 근무 중입니다.
근현대기 한국의 문화예술 이야기를 나눕니다.
1920년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차례로 창간된 연도다. 민족 일간지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처음으로 다루었을까.
1920년 12월은 안타깝게도 동아일보의 1차 정간 기간이었으므로 크리스마스에 대한 내용이 실리지 못했다.
1차 정간에 얽힌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기사를 참조.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170924/86498241/1)
조선일보는 1920년 신문을 발행했으나, 1920년 12월 24일-25일 기사는 중국 군벌들 간 내전 등 해외기사 내용이 주를 이루고 크리스마스 언급이 없다. 1921년 12월에는 조선일보가 정간을 당했을 때라 기사가 없다. 여담으로 당시 조선일보의 정간을 둘러싼 사주(경영진)와 젊은 기자들의 항명 문필활동이 두드러져 재미있는데, 민족적인 기사를 작성해 정간을 먹고, 정간이 풀리면 또 왜 정간 먹였는지 항의하는 기사를 쓰고 또 정간, 풀리면 “조선총독에게 사직을 권고한다”는 글을 써서 또 정간, 이런 식이다.
넘치는 기개를 뒤로하고 다시 세종대로 152 쪽으로 태평로를 건너보자.
1921년 12월 24일, 드디어 동아일보에서 '크리스마쓰'가 언급된다.
1921. 12. 24.
임박한 크리스마쓰
- 마구간에서 처음 비친 한 줄기의 광명 '베들레헴'으로 지구의 구석구석에-
거룩한 '크리스마스'는 도라왔다. 지금으로부터 1925년(기원전 4년) 지중해 연안 유대국에 동방이 아직 밝지 아니하고 온 천지는 신비로운 침묵에 잠기었을 때에 적적한 촌락 '베들레헴' 하늘에는 반짝이는 새별이 비취이며 세계만민을 구원할 '그리스도'는 탄생하였다. 눈은 길길히 쌓이고 바람은 적설을 모라 허술한 주막집 마구간에 눈보라를 들이치는 중에 이 세상에 탄생하여 삼십년 생애를 오직 세상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을 뿌리고 만민을 죄악 속에서 건지고자 하다가 삼십이세의 장년으로 십자가 위에 정한 피를 흘리고 이 세상을 떠났도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천년동안 그의 사도는 오직 그의 마음을 본받아 만민을 건지고 자칼 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구라파 전토로(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수만 창생을 희생에 바친 결과 이천년을 지난 오늘날은 세계만민이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거룩한 이날을 감사와 평화 가운데에 축하하게 되었다. 서양각국에서는 이날을 일년에 제일가는 명절로 알아서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치위는 물독을 얼어 터뜨릴듯 할 때에도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정결한 새 옷을 입으며 예배당마다 평화로운 종소리가 울리고 푸른 크리스마스 추리(성탄을 축하하는 나무=트리^^)가에는 아름다운 꽃과 찬란한 등불로 장식하며 '싼타클로스'라는 온후하고도 익살스러운 노인의 어린아해들을(아이들을) 심히 사랑하여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에는 어린 아이들이 잠든 틈을 타서 여러가지 선물을 버선 속에다 놓고 간다 하여 부모네들은 여러가지 작란감(장난감)을 미리 사다두었다가 침상 옆 버선 속에 넣어두면 어여쁘고 귀여운 어린 아이들은 하루밤 단잠을 자고나서 눈을 부비며 일어나자마자 침상에 있는 작란감(장난감)을 들고 엇저녁에 어느틈에 '싼타클로스'가 내려왔다갔다고 어림없이 속아 넘어가는 턴진난만한 태도도 자손을 귀여워하는 부모들의 재미있는 일이라 조선에서도 이 예수성탄을 축하하기 위하여 전조선 각지에 있는 교회는 모두 성대한 준비를 하여 이 거룩한 날을 유감없이 맞이하고자 한다. 그러나 오늘날 거룩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조선 예수교도들이여! 감사한 이날의 등 뒤에 얼마나 한 희생의 피를 바친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계속)
'추리'와 '버선'이라... 크리스마스 트리와 침대 옆 양말은 이렇게 번역된 것이다. 서양의 풍속을 그대로 들여오는 것이 마치 지식인의 방정한 품행처럼 여겨졌던 시대. 서구의 가정은 일종의 로망이었다.
마리아와 예수 이미지의 출처는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카를로 돌치(Carlo Dolci, 1616-1686)의 <성 모자상(Madonna con Bambino)>. 아마 서구 또는 일본의 어느 화본집을 스캔한 것이리라. 이런 식으로 크리스마스의 기독교적 이미지가 한반도 대중에게 배포되었다.
1921.12.25.
성탄축하의 제일막
경성시대의 '크리스마쓰' 축하식은 재직 23일부터 시작하여 각 교회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23일 밤에는 정동과 중앙 예배당과 기타 수처에서 성대하게 하였는데 사진은 중앙예배당 열린유치원 주최의 유희하는 광경
1921.12.25
크리스마쓰를 전후하야
예수교가 조선땅에 들어온 후로 얼마나 참담한 역사를 가졌는가
예수가 유태국에 탄생할 때로 말하면 그 나라는 망하여 '로마'의 압박을 받고 사회는 부패하여 살인강도 간음 등 무서운 죄악이 백주에 횡행하며 조국을 잃은 인민은 '솔로몬' 왕조를 다시 회복하고자 독립운동이 도처에 일어나서 실로 전국 백성은 도탄 속에 들었었다. 이때에 예수는 탄생하여 가련한 이 현상을 보고 다년 심중에 무한한 고통을 참지 못하여 사십일을 단식기도한 결과 크게 종교의 진리를 깨달아 사년동안 진리를 전포하며 돌아다니다가 다른교의 압박을 받아 일신을 희생에 받치고 그의 사도들도 대개 그와 같은 박해를 받아 피를 흘리었으며 ...(후략)
"예수교가 조선땅에 들어온 후로 얼마나 참담한 역사를 가졌는가"(1921.12.25.) 기사는 로마부터 솔로몬 왕조, 종교개혁, 구교와 신교의 분리부터 정조대 한반도에 들어온 개신교까지 우리나라 천주교와 개신교 박해의 역사를 읊고 있는데, 생각보다 기독교적이고 감정적이다. 찬찬히 읽어보며 100년 전의 동아일보 기자들이 생각하던 크리스마쓰를 복기해보자.
Merry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