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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Mar 03. 2023

죽음과 삶, 그리고 고독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9)

「병풍」은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에서 “죽음을 노래한 시”라고 김수영 스스로 말하는 통에 정말 “죽음을 노래한 시”로 한동안 해석된 작품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직접 시를 읽어 보죠. 지금껏 우리가 읽어온 김수영의 태도와 분위기 등을 감안해야 할 듯싶습니다. 저는 이 작품의 백미는, 제일 마지막 행인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 해사(六七翁 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 주는 것이었다”로 봅니다.      


어떻게 보면 별다른 수사도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앞에서 제시된 시적 정황과 함께 읽으면 어떤 ‘환함’이 느껴질 겁니다. “죽음을 노래한” 것과 다르게 시는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고 합니다. 옛 장례의 풍경을 기억하고 계신 분들은 알겠지만 병풍 너머에는 죽은 이가 누워 있죠. 그 죽음의 세계와 조문을 온 산 사람들의 세계 사이에 병풍이 있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 삶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끊어줍니다.   

   

비록 “죽음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있지만, 왜 그렇겠습니까? 죽음을 맞대면하는 존재는 바로 병풍인데요, 병풍의 얼굴에는 “용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습니다. 용 그림과 지는 해 그림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병풍은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는 데서 드러나듯, 화자는 병풍을 통해 설움의 정서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한 거죠.      


제가 앞에서 설움도 비참도 안 버리고 쟁여둔다고 말한 것도 작품에 근거한 것이고 설움의 정서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했다고 말한 것도 작품에 근거한 것입니다. 일단 작품에 근거해서 말한 다음에, 거기에 모순이 있으면 찬찬히 생각해보는 것이 적절한 독법일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설움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에 차 있는데, 그 예감에 휩싸여 있으면 더 깊은 설움과 절망에 빠질 수 있겠죠?     

 

그래서 설움을 설움으로 긍정해버리는 모험을 시도한 경우가 앞의 경우입니다. 사실 이번 시간에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방 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은 “나의 방 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다고까지 합니다. 물론 이 작품도 설움에 사로잡힌 우울한 작품은 아닙니다. 설움이라는 것도 흐르는 시간 속의 설움인 것이죠. 그런데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 있습니다. 설움을 설움으로 물리치는 일은 마냥 설움의 정서 상태에 머물러서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가득한 설움을 부정하거나 모른 체하는 것은 자기를 기망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설움을 버리지 않고 설움을 긍정하는 것은 이 자기 기망에 대한 경계에 다름 아닙니다. 건강한 영혼은 도저한 설움 상태에서는 설움을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방 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에 와서는 설움을 “흐르는 시간”에 싣습니다. 설움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도 시간 속에서 탄생하는 심리 상태죠.      


당연히 여기서 시간이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건이 응축된 연속 같은 것을 말합니다. 「나의 가족」에서 “장구한 세월”이라고 하죠? 말뜻 그대로 아주 오래된 세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많은 일들이 있었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산다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산다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이렇게 설움을 시간 속에서 받아들이자 조금 더 긍정적인 정서가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앞에서 설명한 「거리 2」와 「영롱한 목표」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병풍」에 와서야 설움을 끊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죠. 다시 말하면 명백히 자신 안에 충만되어 있는 설움을 ‘의지’로 부정(否定)하는 것은, 자기 기망을 통해서 더 부정(不正)적인 상태를 불러들이지만 설움의 자리에 다른 정서가 들어오게 하면 설움은 사라집니다.      


수동적인 정서를 능동적인 정서로 바꾸는 일은, 수동적인 정서에 대해 단지 ‘아니오라고 부정한다고 해서  일이 아닙니다. 울음을 참으려 한다고 해서 울음이 사라지는  아닌 거죠. 차라리 울음을  울어야 웃음이 찾아오는  아닐까요? 울음을 설령 참는다 하더라도 눈물은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흘러 쌓이게 됩니다.      


“병풍”은 시의 화자에게 먼저 설움을 끊으라고 가르쳐 주지만 관념적인 허위가 아닙니다.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있으며 스스로 “비폭(飛瀑)”과 “유도(幽島)를 점지”하는 역량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비폭(飛瀑)”은 물길이 날 듯이 떨어지는 폭포, 즉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말하고 “유도(幽島)”는 멀리 보이는 섬이라는 뜻입니다. 실제 병풍의 그림으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지요.      


다시 말하면, 시의 화자에게 병풍의 그림은 “먼저 끊어야 할 것은 설움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병풍”이 “내 앞에 서서 죽음을 가지고 죽음을 막고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지만 결단코 ‘달나라의 장난’은 아닙니다. 왜냐면 지금 실제로 “병풍”이 죽음과 맞대면하고 있잖습니까? 어디 외진 곳에, 어두운 광 같은 곳에 하릴없이 기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죽음”과 맞대면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병풍”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부정하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현재적 삶을 초월한 ‘다른’ 세계를 시의 화자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시의 마지막 네 행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죽음을 가지고 죽음을 막고 있다

나를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 해사(六七翁 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  

   

분명하게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이죠? 죽음과 삶 사이에서, 둘 다를 긍정할 때만 다른 시간이 열린다는 이 인식은 과연 김수영이 훗날 자신의 현대시의 출발이라고 부름 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트릴링은 쾌락의 부르주아적 원칙을 배격하고 고통과 불쾌와 죽음을 현대성의 자각의 요인으로 들고 있으니까 그의 주장에 따른다면”(「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산문은 미국의 좌파 정신분석학자 라이오넬 트릴링의 논문 「쾌락의 운명」의 지적, 정신적 자장 안에서 쓰여진 글입니다. 「병풍」은 그보다 9년 전인 1956년 작이고요. 「병풍」에 대한 사후 해석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김수영이 자주 언급하는 ‘죽음’을 근거로 김수영에게 끼친 하이데거 영향을 강조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이 부분은 김수영을 잘 아는 누군가가 하이데거 철학마저 섭렵한 다음에 세밀히 검토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여기서 김수영이 말하는 ‘죽음’은 하이데거적인 의미의 죽음이라기보다는 “설움”이 강요하는 것과 더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병풍”이 “가장 어려운 곳”에서 죽음과 삶을 동시에 긍정하며 “비폭(飛瀑)”과 “유도(幽島)를 점지”해 주고 있지만, “병풍”은 삶의 편에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내 앞에 서서 죽음을 가지고 죽음을 막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병풍”을 내가 보고, 그런 ‘나’를 포함해서 달이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 해사(六七翁 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 주는 것”이라는 삶의 그림 한 장을 이승에 남겨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달”이 “병풍” 너머를 비추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만일 “병풍”을 기준으로 해서 삶이 죽음 쪽으로 끌려들어가 죽음과 연관된 존재 사유 쪽으로 넘어갔다면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 의미로 읽을 여지도 있었을 겁니다. 그때는 달이 병풍 너머를 비춰주어야 하고 병풍 이쪽의 ‘나’는 죽음에 대한 사유로 빠져들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시는 전혀 그렇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죽음으로부터 삶 쪽으로 펼쳐지고 있죠. 그러면서 “비폭(飛瀑)”과 “유도(幽島)”가 탄생하고 그 “비폭(飛瀑)”과 “유도(幽島)”가 삶에 관계된 것임을 마지막에 “달빛”을 통해 인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도리어 죽음을 막아주는 병풍을 통해 “비폭(飛瀑)”과 “유도(幽島)”를 그려 보였다는 점에서, 전쟁이 남긴 부정적인 죽음 의식을, 삶을 지탱하는 생활에 대한 긍정적인 자각을 통해 ‘드디어’ 삶으로 전화시켰다고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서 “비폭(飛瀑)”과 “유도(幽島)”를 얻었다고 해서 김수영의 현실이 달라진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그에게 찾아온 것은 고독입니다. 고독은 단지 ‘홀로 있음’의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4‧19혁명 이후에도 혁명의 진전이 없자 김수영을 엄습한 것도 고독인데, 김수영의 고독은 자신의 시가 앞서나가는 데 비해 따라오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일어난 정신적 사태입니다.      


저는 김수영의 고독을 제대로 읽어야 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4‧19혁명 이후의 고독은 다음 시간에 알아보겠습니다만 이즈음의 고독은 그때의 고독과 성질이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폭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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