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가 어렵다고?(19)
1959년말~1960년 초의 정세에서 김수영이 혁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 안에 깊은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했달까요. 그것은 「파밭 가에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김수영은 여기서 다시 ‘사랑’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3연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사랑은 다음과 같이 반복, 변주됩니다.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그리고 각 연의 마지막 행은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를 반복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김수영은 ‘사랑’에 대한 점수(漸修)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점수(漸修)가 없는 돈오(頓悟)는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죠. 수운 최제우도 한울님을 만나고 1년 동안 점수(漸修)를 합니다. 사실 수운의 돈오(頓悟)도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불퇴전의 점수(漸修)가 돈오(頓悟)를 결국 부른 것이고 돈오(頓悟) 이후에 다시 점수(漸修)의 과정을 되밟은 것이죠. 예수도 민중들에게 외치고 병자를 치유하고 나면 꼭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점수(漸修)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자기비판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낸 『리얼리스트 김수영』에서 저는 「파밭 가에서」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정치적 행동”의 개입이 완전히 봉쇄된 그 당시의 정치적 조건에 더 큰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딱히 김수영에게 “정치적 행동”이 체질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1959년의 상황, 즉 이승만 정권의 말기적 상황에서 정치적 상상력은 물론이거니와 시적 상상력마저 질식사할 것만 같은 것을 김수영은 느꼈을 것이다. 「파밭 가에서」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보여주는 “피로”를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파밭 가에서」에서 읽히는 것은 일종의 체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봄밤」에서 보여줬던 생기와 기쁨은 보이지 않고,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의 반복을 통해서 시의 화자는 한 발 비켜서 있으려는 무의식을 내비치고 있다. 특히 3연의 “묵은 사랑이/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젖어 있을 때”는 그 의심을 더 확고하게 한다. 일단 작품의 구조와 호흡이 닮았다는 면에서 「파밭 가에서」는 「봄밤」과 같이 읽을 만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정동은 확연하게 다르다.(186)
그 당시에는 제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상황에 세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김수영을 해석하는 데 급급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정당성을 얄팍한 철학 공부로 뒷받침하려고도 했고요. 그 당시에는 김수영을 읽으면서 니체의 사상이 겹쳐졌던 것은 사실인데, 자기 삶을 극복하려는 초인적인 의지랄까, 그런 점이 닮았다고 판단해서 그랬던 것이지 김수영이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니체의 철학과 유사하다 그래서 인용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 「파밭 가에서」에서 읽히는 것은 일종의 체념이다”는 제 그때 해석은 여기서 철회하겠습니다. 그리고 “「봄밤」에서 보여줬던 생기와 기쁨”이라는 판단도 일면적이었다는 점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파밭 가에서」는 그동안의 자신의 사랑이 “묵은 사랑”이었음을 자각하면서 새로운 사랑이 다시 차오르는 현상을 단순한 구조로 담은 작품입니다.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가 ‘체념’일 수는 없죠. “묵은 사랑”의 껍질이 벗겨지고, 움직이고, 마음에 젖어 있을 때, 그것은 무언가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것을 관념적으로 말하지 않고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점, 그리고 최종적으로 잃어야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에 김수영이 도착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다시 1967년의 「여름밤」처럼, 현실을 초월한 어떤 상태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는 금언은, 오늘날 하나의 클리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에서 풍기는 뉘앙스나 그간의 작품을 읽은 우리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시야말로 ‘간단한 진리’에 도달한 작품입니다. 깊은 고뇌와 피로와 설움을 거쳐 간단한 진리에 도달하는 현장은 앞에서 잠깐 언급한 「꽃잎」의 마지막에도 있습니다.
이렇게 김수영은 혁명을 맞을 준비를 마쳐놨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김수영의 내면과 현실의 혁명이 만나는 줄탁동시가 이루어진 것이요. 이는 참으로 우리 시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만일 혁명이 없었다면 김수영의 시가 어찌 되었을까, 상상해보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시는 저 혼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문학평론가 이어령과의 그 유명한 논쟁에서 김수영은 “‘자유의 영역이 확보될수록 한국 문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화하여 쇠멸해가는 이상한 역현상이’” 벌어진다는 이어령의 견해에 대해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이런 발언을 남깁니다. “무서운 것은 문화를 정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이어령이 정치적 억압에서 창조성이 발현된다고 본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김수영의 판단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정치적 자유를 통해 다양성이 확보될 때 창조성이 살아난다는 게 김수영의 견해입니다. 이는 그 자신이 경험했기 때문에 복잡한 이론적 논리 이전에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정치적 억압은 천재의 창조성을 촉발시킬지는 모르지만, 민중의 욕망이 억압되기 때문에 천재의 창조성은 현실과 동떨어지기 십상입니다. 1970년대 박정희의 철권통치 속에서도 이른바 ‘참여문학’이나 ‘민족문학’의 성과가 있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길게 보면 그 성과도 결국 4‧19혁명이 마련해놓은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신동엽 시인은 이미 4‧19혁명의 전사(全史)로 동학농민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혜안을 보여주었고, 오늘날 그 같은 역사 인식이 점점 퍼져가고도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만일 동학농민혁명에서 3‧1운동, 4‧19혁명,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이어진 혁명의 전통이 없었다면 우리의 문화나 문학은 지금보다 엄청 왜소해졌을 겁니다.
민중의 욕망이 분출되고 표현되는 바탕에서 탄생한 천재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난 천재는 크게 차이가 날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수영에게 만일 혁명이 없었다면……’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김수영 개인의 문제에 대한 호사가의 호기심이 아니라, 문학에서, 특히 시에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되물어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시가 혁명에 대한 열정과 상상력을 갖는 것과 기존 제도를 수용, 추인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시의 입장에서 말할 때, 단순하게 ‘시와 정치’에 대한 사고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민주주의가 고장 났으면 민주주의를 다시 사유해야 하고, 언어가 자본에 의해 타락했으면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를 해야 하고, 심각한 빈부격차와 자연의 파괴를 목도했다면 자본주의 그 자체와 산업 문명의 본질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이를 단지 ‘정치’라는 추상적인 언어 안에 가둬놓고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사고의 확장과 깊이의 누적이 언젠가는 시인의 언어와 상상력을 바꿔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묵은 사랑”을 벗겨내는 이행이기도 하죠. 김수영도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4‧19혁명 이후의 일기가 그 증거입니다.
다른 것은 다 놔두고 1960년 7월 8일 일기의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앞으로 경제 논문을 번역해 보고 싶다―《재정(財政)》지를 보면서 얻은 힌트.” 「백의」에서 백의의 비극은 어떻게 시작됐다고 했죠? “현대의 경제학을 등한히 하였을 때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라고 했죠? 설마, 시를 쓰려면 경제학을 공부해야 하나, 이렇게 받아들이시는 분은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살면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방법과 경로, 무기를 다양하게 해야 깊이도 확보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양한 방법과 경로 없이는 저수지에 물은 차지 않고, 저수지에 물이 차지 않으면 저수지는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깊어진 저수지만이 너른 들판을 적실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