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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May 29. 2023

혁명이 일어나다(1)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20)

「하…… 그림자가 없다」는 3‧15부정선거로 인해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민심을 느끼고 썼던 것 같습니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시의 분위기가 급변한 게 어렵지 않게 느껴지실 겁니다.  연보를 보면 1960년 4월 3일에 쓴 것으로 돼 있는데,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일상에 늘비한 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에 대한 통찰도 그렇지만,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는 구절입니다. “민주주의식”에는 방점마저 찍혀 있습니다.


물론 그 앞뒤로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고 하고 또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고 감정이 고양돼 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는 구절에 주목해보자고 한 것은 이때 당시만 해도 아직 김수영에게 혁명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어쩌면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1960년부터 1961년 5‧16까지 김수영의 시적 인식을 좇아가려면 이 작품부터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은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이어야 한다는 지점에 김수영은 도달해 있습니다. 이게 1960년 4월 초의 김수영입니다.


김수영은 연이어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를 씁니다. 4월 26일입니다. 1960년 4월 26일은 독재자 이승만이 하야한 날인데 그것에 고무돼 번개처럼 이 시를 쓰게 됩니다. 시를 읽어봐서 아시겠지만 김수영이 얼마나 이승만을 증오했는지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인제 상식으로 되었다”고 역설하며 그 벅차오르는 감동을 일필휘지로 휘갈긴 겁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썩어 빠진 어제와 결별”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승만의 하야는 김수영에게 그 기폭제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훗날 공식적으로 4‧19혁명이라 이름 지어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4‧26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이날의 감동과 충격은 컸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4‧19혁명에서 불온성이 느껴지지 않지만 대한민국 공화정 사상 민이 나라를 뒤엎은 최초의 사건이 바로 4‧19혁명입니다. 예전에는 박정희에 의해 4‧19혁명이 4‧19학생의거로 낮추어 불렸지만 그 당시에는 혁명적 사건이었던 게 분명하고 그것을 김수영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쓸 때까지만 해도 김수영은 ‘혁명’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가 상식이 된 상황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여 일 뒤에 쓴 「기도―4‧19 순국학도위령제에 부치는 노래」에서 드디어 ‘혁명’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1연 마지막 행에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2연과 3연에서 다시 ‘혁명’이란 말이 등장하고 마지막 연 마지막 행도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고 재차 외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심히 읽고 넘어가고는 하는 대목입니다만, 3연 4~5행에서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라고 말하죠? 즉 김수영은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와 자유가 상식이 되었다고 한 데에서 더 나아가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1960년 6월 21일에 김수영은 일기장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다음은 빈곤과 무지로부터의 해방”. 그러니까 김수영은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차원, 정권교체만을 바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독재에 심신이 너무 지치면 독재자를 몰아내고 한숨 돌리고 싶은 게 일반적인 심정이고 김수영 당시에도 대부분 그랬던가 봅니다. 하지만 김수영은 ‘사회주의’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여기에서 당대의 일반적인 인식과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김수영이 생각한 사회주의는 그 당시 존재했던 체제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니었을 겁니다. 월북한 친구 김병욱에게 쓴 서간문 형식의 산문 제목이 ‘그 하늘 열릴 때’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요즘 식으로 해석하면 ‘개벽’의 의미입니다만 김수영이 그 당시 개벽에 준하는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혁명의 극한을, 절대적인 혁명을 바랐다는 것은 확실하고 그것에 대한 인식의 편린은 마지막 연에 등장합니다. 어찌 보면 절대적 혁명을 바란 것 자체가 개벽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반론으로, 그것은 시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맞습니다, 시 자체가 개벽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2연의 뒷부분에서는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살쾡이에게”에서부터 “수리에게 빈대에게”까지, 그러한 것들에게 다치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혁명을 완수하자고 하고서는 3연에서는 “이번에는 우리가” 더 악독해져서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혁명을 성취하자고 말하죠. 다시 말하면 김수영은 혁명을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어날 수 있는 오류와 과오마저 두려워하지 말자고 하고 있죠. 그러지 않고는 혁명이라는 것은 어림없으니까요. 만일 그 오류와 과오를 통해서 혁명이 성취된다면, “나의 죄 있는 몸의 억천만 개의 털구멍에/ 죄라는 죄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가 여기에서 멈추면 단순한 선동시가 되고 말 것입니다. 혁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그것마저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그래야 한다는 말하는 데서, 혁명도 ‘시의 마음’으로 임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연인 5연의 내용이죠. 읽어보겠습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사납고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같은 우악스런 태도와 “시를 쓰는 마음”이 현실에서는 공존할 수 없겠지만 시에서는 가능한 것이고, 이런 모순이랄까 언어도단의 상태가 시의 지평에서는 환희처럼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작품 전체적으로는 혁명적 낭만주의의 냄새가 나는데 이런 혁명적 낭만주의는 훗날 「사랑의 변주곡」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사실 혁명은 이성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사건이죠. 물론 역사 자체가 낭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낭만을 통과하지 않은 이성적인 상태라는 것은 고루하고 답답할 뿐입니다. 낭만적 감성이 이성에 때때로 범람하지 않으면 이성은 완고해질 뿐입니다.


감성의 범람이 이성을 흔들어놓는 일 자체가 시의 특권이기도 하고 거기에서 진실한 시적 태도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fact)과는 다르지요. 어쩌면 검불 속에 숨어 있는 새알처럼 사실과는 그 모습이 조금 다른 게 진실일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의 특권’은 ‘시인의 특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논리적 사고를 괜히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감성과 직관이라고 불러두죠. 사실 이성과 감성, 논리와 직관을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적 사유와 상상력은 이것들이 다 혼합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의 온전한 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의 특권’이라는 말은 건강한 생명의 작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모두 ‘시의 특권’이 있는데, 그 전제는 얼마나 우리의 몸과 내면이, 삶이, 역사에 참여가  시적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온몸’이 되었을 때와 바라고 꿈꿔왔던 세상이 역사의 지평으로 솟아올랐을 때와 만나는 순간, 거기에 도취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도취가 피안이 아닌 것이죠. 오히려 도취가 현실적 사태인 것이고, 지금 김수영이 그런 상태입니다.  


여기서  즈음에  산문을 잠시 살펴보죠. 먼저 「책형대에 걸린 시―인간 해방의 경종을 울려라」를 보면, 김수영이 고백한 1950년대의 자기 상황이 눈에 띕니다. 그때에는 “시는 어벌쩡하게  왔지만 산문은 전혀  수가 없었고 감히   생각조차 먹어 보지를 못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직접 들어보죠.     


말하자면 시를 쓸 때에 통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캄푸라주’*가 산문에 있어서는 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자유뿐이 아니다. 태도의 자유조차도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처럼 6‧25 때에 포로 생활까지 하고 나온 사람은 슬프게도 문학 단체 같은 데서 떨어져서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도저히 없었다. 감정의 자유 역시 그렇다. 이를테면 같은 시인끼리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불쾌한 일이 있더라도 그런 감정을 먹어서는 아니 되고 그런 태도를 극력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이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저주가 아니면 비명이 아니면 죽음의 시가 고작이 아니었던가.    

*compuflage. 위장, 은폐 등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1950년의 자기 상황을 이렇게 고백한 글 중 가장 솔직한 장면이기도 하면서 김수영이 혁명에 취하게 된 심리의 기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산문은 어떤 자기 은폐도 가능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꿈을 1950년대에는 말할 수 없었다는 거죠. 사실 숨길 수밖에 없는 감정과 꿈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바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폈던 1950년대 후반의 비애와 피로, 그리고 낙담에 대한 김수영의 내면적 배경이 드러나는 장면이면서 이 글 자체가 4‧19혁명을 맞아 화산처럼 폭발한 김수영의 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 힌트를 줍니다.


혁명이 시보다 앞서는 일이며, 혁명에 몰두하는 일이 시 쓰는 일보다 본질적이라는 인식까지 보여줍니다. “너무 눈이 부시다. 너무나 휘황하다. 그리고 이 빛에 눈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지기까지 잠시 시를 쓸 생각을 버려야겠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4‧26의 해방은 꿈의 해방”이므로 이제 시인은 “구김살 없는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말한 ‘생명의 문화’까지 꿈꿔야 한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해방”의 경지이며 이 “시대의 윤리의 명령은 시 이상”입니다.


이렇게 김수영이 꿈을 높게 잡는 것은 “이 벅찬 물질 만능주의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신의 구원이라고” 그 스스로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목에 드러난 그대로 김수영에게 자유나 혁명이란 “구김살 없는” 생명의 발현이며 생명의 발현은 “벅찬 물질 문명에 대한 구슬픈 인간 정신의 개가(凱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좀 더 먼 곳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자유란 생명과 더불어」) 여기서 김수영이 말하는 ‘정신’은 관념적인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구김살 없는 원대한 꿈”, “인간 해방”, “벅찬 물질 문명에 대한 구슬픈 인간 정신의 개가(凱歌)”라는 표현들은 기표는 각자 다르지만 결국 같은 뜻입니다.


1960년 8월에 발표한 「독자의 불신임」에서 “영혼의 개발”을 말할 때, 그것도 역시 같은 말입니다. 도리어  “영혼의 개발”을 말함으로써 김수영이 생각하는 시가 궁극적으로 가져야 할 “원대한 꿈”이 무엇인지 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영혼”이란 단어에서 생길 오해를 염두에 두면서 자신이 말하는 원뜻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두죠.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영혼이란, 유심주의자(唯心主義者)들이 고집하는 협소한 영혼이 아니라 좀 더 폭이 넓은 영혼―다시 말하자면 현대시가 취급할 수 있는 변이하는 20세기 사회의 제 현상을 포함 내지 망총(網總)할 수 있는 영혼”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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