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03일 >>>
우리 사위는 뿌리가 유럽에 있는 미국인이다. 부계(父系)는 독일 이민자의 후손, 모계(母系)는 핀란드 이민자의 후손이다. 그의 이름 “사일러스(Silas)”는, 신약성경에서 바울이 전도여행을 데리고 가는 그 “실라(Silas)”와 똑같다. 내 딸 수연이(Sue)도 대견하지만, 나는 우리 사일러스가 너무 자랑스럽다. 천성이 따뜻하고 온유한 데다가, 깍듯한 예절, 겸허함, 놀라운 인내심, 검소함, 근면성, 최고의 대인관계,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 등, 어디 뺄 데가 없다.
2016년, 사일러스의 본가 위스칸슨 농장에서 치러졌던 저희들 결혼식 이튿날, 그 댁 부모형제자매와 둘러앉은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천사들은 날아다니는데, 나는 걸어 다니는 천사를 봤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자식이요 형제인 사일러스입니다.” 몇 번 안 봤지만, 내 눈에 그는 이 세상 최고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 9년, 그때 그 나의 말과 뜻은 눈곱만큼도 변함이 없다. 사일러스는 내가 본 중에 가장 “된 사람”이다. 그간 아내에게 수십 번도 더 얘기했다.
“수연이는 벤쳐 창업보다 배우자 만남이 훨씬 더 탁월했다.”
사람이 직감(直感) 같은 것이 있는지, 2010년에 사일러스가 시카고대학을 휴학, 수연이의 사업에 막 합류했을 때, 우연히 잠깐 지나치면서 나는 불쑥 이렇게 한마디 했었다.
“사일러스, 수(Sue)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바로 자네가 필요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데다, 학교 휴학하고 그 등록금을 전부 회사에 넣었던 귀하고도 고마운 사람. 감사의 표시로 한 말이 마치 예언처럼 됐다. 당장은 물론, 일평생 필요한 바로 그 사람이 결과적으로 내 딸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사일러스는 대답할 말을 몰라 멈칫거리기만 했었다.
그리고 6년을 함께 일한 뒤, 회사에서 두 사람이 각각 결혼발표를 했는데, 둘 다 얼마나 입이 무거웠으면 날짜가 임박해서도 “그 둘이 서로 신랑신부”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4년 뒤, 첫딸 “하솜”이가 --- 미국 이름 시몬(Simone) --- 태어나 사진을 회사 사이트(brilliant.org)에 올렸는데, 하하,
“지미(Jimmy)가 왜 아기를 안고 있느냐?”
며 직원들이 의아해했다고 한다. 내 이름을 알고, 회사 프로필(profile) 사진으로 내 얼굴을 알고, 나랑 온라인으로 늘 일은 같이 했지만, 내가 Sue의 아빠인 것은 대부분 몰랐던 것이다.
사일러스의 요리 실력은 웬만한 호텔 요리사 뺨친다. 2년제 특수대학 딥스피링즈(Deep Springs) 재학 시절, 매끼마다 6, 70인 분(分) --- 학생, 교수, 교직원, 학교농장 인부 등 --- 음식을 교대로 해 댄 경력이 어디 가랴. 그 학교는 매년 열 두세 명의 수재들만 전면장학금으로 뽑아 전교생이 25~6명. 이 학생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 신입생 선발, 교수 채용, 학교 경영, 농사, 목축, 세끼 요리 --- 다 하는 아주 특별한 인재 양성소다. 물론 각자 2년치 학점도 따야 한다. 사일러스는 거기 졸업 후 시카고대에 와서 수연이를 만난 것이었다.
나는 햄버그, 샌드위치, 파스타 등은 느끼해서 싫어했는데, 사일러스가 좋은 재료로 제대로 해 주니 정말 맛있다. 또 우리가 미국 오면 주말엔 사일러스가 요리 당번인데, 매 주말 꼭 고급 레스토랑을 가는 기분이다. 해 주는 음식들이 때깔도 맛도 전부 기가 막힌다. 사일러스도 월~금에 아내가 해 주는 한국음식이 --- 떡국, 시래기국, 샤부샤부, 된장찌개, 김치찌개, 삼겹살, 김밥, 꼬리곰탕, 유부초밥 등 ---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서로 음식에 대해 물어보고, 의논하고, 레스피(recipe)도 교환하고, 때로 요리도 같이 하는 모습은,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그림이다.
한국에 고부 갈등이 있듯이 미국엔 장모-사위 갈등이 있다지만, 이처럼 사일러스와 아내는 서로 너무 친하다. 친구처럼, 누나-동생처럼, 늘 쑥덕거리고 낄낄거린다. 우리 손자 주안이가 “성격 좋은” 이 두 사람의 DNA를 많이 물려받았는지, 두 돌도 안 된 놈이 종일 웃고, 춤추고, 땡큐 땡큐도 잘 한다. 반면에 나와 수연이는 서로 거의 말이 없고, 나-수연-하솜이로 이어지는 3대(代)는 상대적으로 많이 까칠하다. 하하, 그러고 보니 여섯 식구의 성품이 공평하게 3대3,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것도 한 대(代)에 한 명씩, 각 3명이다.
우리가 사는 하이드팍(Hyde Park)은 시카고대학을 중심한 대학촌 같은 곳이라 통닭집이 많다. 하루는 주안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돌아다니며 세어 봤더니 53가에만 열 군데가 넘었다. 그래서 그 얘기를 집에 와서 하자 사일러스 왈, “하이드팍은 닭들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동네”라 하여 모두 깔깔 웃었다. 한번은 외식하고 남겨 온 포장 음식들을 아내가 --- 냉장고가 비좁아 --- 베란다에 쭉 놔둔 걸 보고 사일러스 왈, “행인들이 우리집 파산한 줄 알겠다” 하여 또 전부 배를 잡고 웃었다. 사일러스는 이처럼 유머 센스도 뛰어나, 우리집엔 하루도 안 빼고 웃음꽃이 핀다.
미국 오면 아내는 주로 요리와 집안 청소, 나는 손녀손자 등하교와 식기세척/정돈, 수연이는 100% 회사일만 하고, 그 외는 사일러스가 자신의 회사일과 함께 전부 다 한다. 물론 내가 적극 돕는다. 양치시키고, 밥 먹이고, 옷 입혀 애들 학교 보내고, 저녁에 또 밥 먹이고, 놀이터 데려가고, 책 읽어 주고, 재우고, 주말엔 자전거 태우고 박물관 데려가고…… 그러다 애들이 한 번씩 떼를 쓰고 울어도 그는 목청 한 번 안 높인다. 끝까지 달래고 대화하고 어루만져 주고 기다려 준다. 한 대 “찰싹” 하면 영원히 고쳐질 버릇을, 절대 그렇게 안 한다. “육아”만 보면, 그는 가히 신선(神仙)이다.
사일러스는 나를 “지미(Jimmy)”라 부른다. 호칭만큼 실제 관계도 더없이 자연스럽다. 비디오 찍어서 얼굴 가리고 보면, 마치 사일러스가 형, 내가 동생처럼 보일 것이다. “지시”는 주로 문자로 오는데, 가령 하솜이가 열이 있어 조퇴하니 데려오라, 뭐뭐가 떨어졌으니 급히 좀 사 오라, 무슨 배달이 곧 올 테니 잘 챙겨라, 애들 치과 예약이 몇 시니 같이 가자 등등…… 그래도 그는 단 한 번 감사 인사를 잊는 적이 없고, 수고했다며 가끔 툭툭 내 등을 쳐 주기도 한다. 불필요한 격식 없이도 도리를 다하며 최대의 “효율”을 내는 것, 이것이 우리집의 힘이요 나아가 미국의 힘일 것이다.
사일러스는 인물도 좋다. 손녀손자도 아빠를 닮아 정말 예쁘다. 우리 부부는 옛날 미인 여배우 “소피 마루소(Sophie Marceau)”랑 사일러스가 많이 닮았다 했는데, 브릴리언트(brilliant.org) 직원들은 젊은이들답게 아래의 두 배우를 꼽는다고 한다.
1. 제시 아이젠버그(Jesse Eisenberg --- 2013년 영화 “Now You See Me”)
2. 안셀 엘고트(Ansel Elgort --- 2017년 영화 “Baby Driver”)
그래서 진짜로 이 영화들을 봤더니, 끝날 때까지 내내 사일러스를 쳐다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들과 사일러스의 큰 차이는, 사일러스는 정말 “따뜻하게” 생겼고, 실제 행동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태 총 대여섯 번 사일러스랑 우버(Uber)를 같이 타 봤는데, 매번 그 짧은 15~20분에 금방 그 기사랑 “절친”이 되는 것을 보고 우리는 탄복했다. “외로운” 그들의 말을 그렇게 잘 받아 주고 맞장구쳐 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사일러스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한번은 아내가 사일러스 얘기를 대학동창에게 했다고 한다. 친구가 다 듣고는 “너네 사위는 그럼 단점이 뭐니?” 하고 묻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그래서 뒤늦게 나한테 “여보, 사일러스가 단점이 있어요?” 하고 묻길래, 내가 대뜸 대답했다. “많지! 주차 똑바로 안 하고 비뚤게 세우는 것, 옷 벗어서 아무데나 툭 던져 놓는 것, 애들 목욕 자주 안 시키는 것, 애들 양말 대충 느슨하게 신기는 것, 요리 한 번 하면 부엌을 폭탄 맞은 듯이 어질러 놓는 것 등등, 많잖아.” 하하,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오히려 그는 내 눈밖에 났을 것이다. 할 일이 그렇게 많은데 이런 것도 일일이 다 챙기면 어디 신(神)이지 사람인가? 나는 늘 즐거운 마음으로 사일러스의 뒤치닥거리를 한다.
이 세상에서 나는 딱 두 사람에게 순종한다. 일체 불평하거나, 단서를 붙이거나, 예외를 두는 법이 없다. 한 사람은 당연히 아내인데, 솔직히 무서워서 그렇게 한다. 하하, 불순종의 대가가 어떤 것일지, 얼마나 가혹할지를 모르는 그 “불안”이 다분히 그 순종의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위에 대한 순종은 사뭇 차원이 다르다. 그는 어느 한 구석 뺄 데 없이 “된 사람”, 따라서 나의 순종은 100% 자발적이다. 인성 바르고 유능한 그런 인물이 이끌고, 나 같은 사람이 따르고 해야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다. 매일 우리 사위를 보면서 떠올리는 단어는 딱 하나다. 감사(感謝). 하늘에 감사, 사람에 감사, 오직 감사한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