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드디어 보게 되었다.
직장인의 비애(?)와 개인의 성장과 성찰을 잘 표현한 명작으로 유명했던 작품이어서 기대가 컸다.
패션 매거진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 앤드리아.
비서가 정/부 체계로 2명이고 모든 비서의 호칭은 에밀리이다. 주변 사람들도 비서가 바뀐 상황에서 미란다의 에밀리라고 부른다. (여기부터 느낌이 안 좋다. 회사 구성원이 일종의 기계부속품처럼 느껴지고...)
입사 첫날부터 앤드리아의 핸드폰은 거의 매시간 울린다. 퇴근 후 집에서 쉴 때에도, 아직 제대로 기상하지 않은 아침에도. 이 모든 상황은 그의 상사 미란다의 지시 때문이다.
앤드리아는 매일매일 그만두고 싶은 욕구가 밀쳐 오르지만, 1년만 버티고 뉴욕에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어 한다.
모호한 업무지시. 대충 말하고 철썩 같이 알아듣기. 매우 짧은 리드타임. 아침식사로 스테이크 가져오게 한 후 다른 약속 잡기. 잦은 개인적 심부름. 도저히 할 수 없는 미션 부여 후 수행여부로 사람을 판단…….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해고 위협이다.
2006년 미국 뉴욕이 배경이지만 요즘 한국 사회에서의 기준으로 말하면, ‘직장 내 괴롭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앤드리아는 개인적 심부름에 시달리게 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 영화 - 포토 - 스틸컷] 한편, (항상 그렇지 않을 수는 있지만) 지옥 같은 상사가 있어도 그 회사에 리텐션 되는 이유는 도움을 주는 선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란다의 인정을 받는 선배인 나이젤은 패션 감각이 떨어지는 엔트리아를 패션 측면에서 도와주었고 앤드리아는 미란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척척 알아서 잘 처리하게 된다.
죽으리라는 법은 없나 보다. 길을 찾으면서 노력하는 사람에게 길은 언젠가 열리기 마련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1.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 정도일지는 애매하지만, 미란다의 혹독한 명령 속에 앤드리아 본인 마음속에서 점차적으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되었던 듯하다.
이미 기존부터 재직하던 선배 비서는 이미 미란다에게 맹종하고 있다. 그 자리는 수백만 대 일의 경쟁률이 있는 자리라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혹독한 근로환경에 본인을 몰아넣는다.
앤드리아는 남자친구 및 정말 절친들이 오해하게 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지만, 본인은 점점 적응하고 저널리스트라는 꿈도 살짝 뒤로 하고 패션잡지 세계에서의 다소 호화로운 생활과 미란다의 조용한 칭찬에 만족하게 된다.
미란다가 사용한 방법은 무리한 요구를 반복하고 못하면 못한 사람이 자책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미란다가 하는 행동. 비서에게 옷 집어던지기. [이미지 출처 : 네이버 - 영화 - 포토 - 스틸컷]
일반적인 도전과제 수행과는 다르다.
당사자를 위한 과제 부여 또는 사안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한 지시와도 거리가 멀고, 철저하게 본인 편하자고 과도한 요구를 한다.
(물론, 회사의 상사이니 과도한 요구도 업무의 일환이었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가스라이팅 정도인지는 몰라도 철저하게 타인을 본인에게 길들이는 것이다.
(해당 회사나 조직 상황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회사 및 조직에 재직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상사가 지위를 이용하여 주변이 본인에게 맞추게 한다.
지위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 관계에서 어느 정도 보편화 된 상황인 듯하고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씁쓸하다.
2. 괴롭힘
우리나라는 '19년부터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법규제가 실행되면서 회사 내에서는 괴롭힘에 대한 수많은 제보와 조사 그리고 징계 등 조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에 대해서는 육아휴직 다음으로 거의 국민상식화 되어가는 느낌을 가진다.
동료들 간의 대화에서도 ‘어? 이거 괴롭힘입니다.’라고 웃으면서 농담을 서슴지 않는다.
대한민국 직장 사회 문화를 상당히 많이 바꾼 법 조문이다. (분명히 피해자를 보호하는 긍정적인 장면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거짓 피해자들이 생기고 갈등이 증폭되는 부정적인 장면이 발생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1)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2)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3)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이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 2)
2006년 미국 배경의 영화이지만, 2019년 이후의 한국의 상황에 대입해 보자.
미란다의 행위는 1) 상사의 지위에서 부하에게, 2)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서 자녀들에 대한 심부름도 시키고,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목표를 부여하였고, 3) 정신적 고통과 함께 해고 유형의 단어를 언급하며 고용단절에 대한 불안에 휩싸이게 했다.
1)과 3)의 요건은 거의 성립하는 듯하다.
문제는 2)의 업무상 적정 범위에 대한 부분이다.
괴롭힘의 가해자는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단지, 업무 능력을 테스트한다 또는 정상적인 업무지시이다라고 생각한다.
미란다는 본인의 쌍둥이 자녀를 위해서 '해리포터' 출간 전 원고를 구해오게 한다.
할 수 없는 일을 지시하고 해 오면 통과이고 못 해 오면 고용관계의 단절을 위협한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업무 관련성도 없다.
명확하게 개인적인 부당한 업무명령이고 이를 어긴다거나 수행하지 못한다고 하여 문제 될 것은 없다.
미란다가 앤드리아에게 여러 지시를 하고 있다. [이미지출처 : 네이버 - 영화 - 포토 - 스틸컷]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유형의 문제에서 업무 관련성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이슈가 있다.
회사에서 상사가 지시하는 것이므로 대부분 업무 관련성이 있다.
고용노동부 가이드에 의한 ‘적정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인정되기 위한 판단요건’으로는
1) 그 행위가 사회 통념에 비추어 업무상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거나
2) 필요성은 인정되더라도 사회통념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하지 않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너무 추상적이다.
노동부 가이드는 행위의 모습에 집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 폭행이나 과도한 폭언을 수반하는 등 사회통념상 상당성을 결여
2) 업무상 필요가 인정되더라도 사업장 내 동종유사업무 근로자에 비하여 합리적인 이유 없는 문제 행위
미란다처럼 너무 많이 알아서 너무 많은 생각이 있어서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일 뿐, 업무와 관련성은 분명히 있다.
자녀 관련 심부름이나 특별 지시를 하였지만, 아주 많은 업무지시 중에 개인적인 것이 1개 들어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반복성, 지속성, 의도성이 없다면 인간관계에서 용인될 수 있는 부탁의 수준인 심부름은 사적 용무지시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한편, 업무상 적정범위와 도전적 과제 부여에 대해서는 판단이 어렵다.
예를 들어, 인사기획담당자는 인사 관련 모든 사항에 관련 있고, 인사는 회사 구성원 모두에 연결되어 있고 회사 정책 기획에 관련되어 있으니, 사회적 이슈부터 회사의 전략적 방향성 및 개별 구성원의 작은 고충까지 모두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상사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상사가 갑자기 지시한다.
“우리 구성원들이 업계 최고의 성과를 창출할 수 있게 하는 성과관리 방안을 내일 봅시다.”
이런 주제를 하루 만에 어느 정도의 해결방안으로 가져가야 하지?
혼란에 빠진다.
내일까지 가져오면 본전이고, 못 가져오거나 미흡하게 가져오면 실력이 없다고 낙인찍어 버린다.
하루 밤을 꼬박 새워서 간신히 만들어 갔다.
그런데, ‘응. 수고했어. 그런데 이 주제와 함께 보상경쟁력은 어쩌지? 이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나? 안 했다고? 역시 생각이 짧군. 내일까지 다시~!’
아~ 힘 빠진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업무상 적정 범위의 지시’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인사기획담당자’이니까……
3. 성실성
이런 괴롭힘 상황까지 간 경우에는 결국 이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노력한다.
일반적으로는 도망친다.
그런데 실력이 좋고 똑똑해서 그런 위기의 순간을 벗어난다.
현실에서는 이런 것이 오히려 문제일 수도 있다.
어설프게 하면 이미 쫓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악착같이 해낸다.
그리고 어느덧 익숙해진다.
역시 성실하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있어서 회사는 유지되는 것인가?
4. 인간미
정말 철옹성 같고 흔들리지 않는 상사.
그런데 그 순간 이 사람도 사람이다. 개인적인 집안 문제가 발생하고 이 속에서 약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아픈 구석이 있고 이를 안 들키려 하지만 우연히 들킨다. 그리고 도와주려 한다.
정말 숨도 못 쉬게 몰아치는 상사가 살짝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인간다운 모습은 있네.’라고~
회사라는 울타리는 수많은 업무수행과 그 속에서 인간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힌 조직이다.
혹독하게 대하는 상사가 있어서 수많은 업무가 유기적으로 잘 처리되는 경우도 있고,
성실하게 현명하게 이를 잘 처리해 주는 부하가 있어서 잘 처리되는 측면도 있다.
모두가 자기의 상황에서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본인의 욕심과 기준 잣대 하에서 남을 너무 본인 스타일에 맞추면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상사들에게 묻습니다.
이제까지 열심히 했고 많은 성공을 거두셨나요?
그럼, 이제는 본인의 성공과 함께 본인 옆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사람을 진정으로 인정해 주고 키워주셔야 합니다.
부하들에게 묻습니다.
오늘 하루 상사 때문에 너무 힘들었나요?
그래도, 상사가 (성격은 좀 안 좋고 독선적이더라도) 전문성 높고 업무적으로 배울 점이 있다면, 일단 그 사람도 ‘인간미 있는 사람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일단 상사를 도와주면 됩니다.
딱 1년만 해 보세요. 그래도 너무 힘들면 놓아버리면 됩니다. 나중에 놓아버리더라도 분명히 배우는 것은 있을 거예요.
추가적으로 덧붙이면,
영화 초반부에 시달리는 앤드리아를 보면서 나중에 이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면서 보게 되었다.
역시나, 결말에서 얻은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정말 못살게 굴던 상사가 결국 내 인생을 돌아보고 올바른 인생으로 안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그런 말이 있었다. 다음의 2가지 경우의 상사 중 누구와 일하는 것이 좋은가?
1) 정말 혹독하게 하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실력이 뛰어나게 되어 있는 경우
2) 편안하게 해 주는데 시간이 가도 실력은 별로 안 늘어나는 경우
(결론적으로는 본인 역량개발 차원에서 '1) 번 케이스의 상사'가 좋겠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이런 상사와의 시간을 보내면서 퇴사 확률도 높아질 수 있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본 영화의 포스터에 담긴 대표 표현이다. “최고의 기회는 달콤한 지옥에서 완성된다.”
판단은 개인들의 몫으로 남긴다.
오늘도 각자의 직장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여러분들을 응원합니다.
[ 사용 이미지 출처 : 네이버 - 영화 - 포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