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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Oct 25. 2023

야만적 문명에 대한 비판과 성찰

-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을 보고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플라워 킬링 문>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이 착 가라앉습니다. 울적해지기 쉽죠. ‘인간은 애초부터 사악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명제를 뒷받침해 주는 귀납적 사례와 맞닥뜨렸다고나 할까요. 인간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이는 만큼 무력감도 비례해서 커지게 됩니다. 인간은 먹고, 자고, 싸는 존재라 할지라도 좀 더 정갈하게 먹고, 우아하게 자고, 깔끔하게 싸는 존재라고 목소리를 높인 게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죠. 인간은 돈에 미친 아메바적인 존재란 걸 부인하기 힘듭니다. 그게 유전자에 깊숙이 박혀 있어 돈을 향한 획일적이고, 단순한 행동을 무한반복하고 있으니까요. <플라워 킬링 문>이 그런 치부를 보여줍니다.  

  요즘은 실현 불가능한 스토리라고 할지라도 상쾌하고, 유쾌한 결말의 영화가 좋습니다. 영화관을 나서 차를 몰고, 혹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영화의 잔상들이 그윽한 향기처럼 뇌리에 남아 있으면 뿌듯하고, 잠도 잘 자게 되니까요. 운이 좋으면 영화의 연장선상으로 달콤한 꿈까지 꿉니다. 영화적 장면이 현실이 되는 기적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우울한 현실에서 위로가 되고,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영혼의 비타민이 되고도 남습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플라워 킬링 문>은 검은 황금인 원유를 소유한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 족에 대한 백인들의 살육과 약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새로울 게 없는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플라워 킬링 문>이 전율을 느끼게 하는 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연출방식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느낀 점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눈길이 가는 건 당연히 주인공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입니다. 흑백사진에서 칼라로 바뀌며 산업화의 상징인 증기기관차를 타고 등장하는 어니스트는 전쟁에서 막 돌아왔습니다.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오클라호마의 원주민 오세이지 부족의 작은 마을로 온 거죠. 검은 황금인 원유가 터지는 바람에 달러가 넘쳐나는 곳이었으니까요. 어니스트의 첫인상은 무기질 청년에 가까웠습니다. 초점이 흐릿하고, 휑하게 보이는 눈동자. 그건 건강하고, 창조적인 열정과 에너지가 아니라 무모한 탐욕과 파괴적인 욕망을 드러내겠다는 징후로 보였습니다. <젊은이의 양지>의 조지 이스트먼(몽고메리 클리프트)이 무모하게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으로 일탈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돈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유일한 지상목표가 되면 파멸에 이르기 쉽죠. 돈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맛을 알기 시작한 어니스트의 삶은 강도와 살인, 그리고 도박으로 이어집니다. 그가 원주민 몰리(릴리 글래드스톤)와 결혼한 것도 사랑보다는 돈에 끌렸다고 볼 수 있죠. 결혼만 하면 엄청난 부를 상속받는 자격을 얻는데 게으르고, 돈밖에 모르는 그의 천성이 그걸 마다할 이유가 없죠. 영화를 보는 내내 어니스트한테 거부반응이 이는 건 그의 악마적 삶이 자발적 행동이 아니라 삼촌인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니로)로부터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라는 알리바이 때문인데 그 또한 고도의 기만이었던 거죠. 어니스트는 애초부터 탐욕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이제 그 탐욕을 드러낼 기회를 얻었고, 가족애는 그걸 치장하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심적 갈등과 고민이 거세된 채 인슐린에 넣은 약물 주사를 몰리에게 주입하는 장면에 관객이 동화되거나 몰입하지 못하는 것도 악마의 화신인 삼촌 윌리엄 킹 헤일 때문입니다. 어니스트가 나중에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삼촌을 배신한 것도 어니스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돈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몰리로부터도 용서받지 못하죠. 도덕이나 신념은 고사하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잃어버린 자의 마지막은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동정의 여지가 없죠. 

  “내 영혼은 깨끗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라는 어니스트의 고백에 몰리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무슨 주사를 놓았는지 묻습니다. 대답하지 못하는 어니스트를 두고, 말없이 떠나버리죠. 생각 없이 사는 자들은 발꿈치에 송곳이 찔린 뒤에야 후회를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겁니다.  



  둘째, 악마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 윌리엄 킹 헤일입니다. 그가 위험한 이유는 어둠의 악마가 아니라 찬란하고 부드러운 햇빛으로 치장한 악의 화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지킨다는 가족주의를 내세워 남의 가족을 파괴하고, 약탈합니다. 돈 때문에 우연으로 가장해서 반복적으로 사람을 죽인다기보다 사람을 죽이면 그게 다 돈이 될 뿐입니다. 사람이 다 돈으로 보이는 데 그걸 마다할 이유가 없죠. 죽여도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였을 뿐이야. 개인적인 사감은 없어.’

  어니스트와 몰리를 결혼시키고 나서도 두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심리적 긴장을 이끌어나가는 사악함에는 몸서리가 쳐집니다. 그렇게 탁월하게 악마적 캐릭터를 통해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윌리엄 킹 헤일의 개인적인 범죄보다 오세이지 부족을 약탈하는 서구 문명의 치밀한 시스템과 자신의 우월성을 맹신하는 야만적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플라워 킬링 문>은 비극적 로맨스 류의 신파에 지나지 않았겠죠. 윌리엄 킹 헤일의 오만과 비도덕적인 행동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어떤 탈출구도 없는 감옥으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인간은 요란하게 즐기다가 사라지는 소모품이라는 열패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긴 돈 자랑, 집 자랑, 애인 자랑을 하는 건 두 발로 걷는 짐승들의 슬픔이지만. 



  셋째, 차분하고 낮은 어조로 말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몰리 카일라의 캐릭터는 놀랍습니다. 산문으로 숭고하다는 걸 묘사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아무리 잘 표현한다고 해도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되기 쉽죠. 하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몰리의 눈동자, 얼굴표정, 몸짓으로 그걸 충분히 보여주고, 관객에게 감득시킵니다.   

  몰리는 사랑을 연료로 삼아 살아가는 보통 사람입니다. 가족의 연대감을 중시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신뢰를 중시하죠. 어니스트가 몰리에게서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이유도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관계는 신뢰를 기반으로 맺어지고, 지속됩니다. 어니스트가 몰리에게 신뢰를 잃은 건 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한 배신행위 때문입니다. 인슐린 주사에 넣은 약물이 몰리를 죽이는 걸 몰랐다면 무지와 무관심으로 변명할 수 있지만 삼촌의 마리오네트이면서 동시에 그걸 즐겼다는 건 그의 삶이 몰리로부터 모조리 부정당하는 근거가 됩니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어니스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배신이었기에 용서가 안 됩니다. 어쨌든 몰리는 어니스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동시에 자기 파괴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건 그녀에게 사랑이 그만큼 소중하고, 전부였다는 걸 의미하죠. 하지만 그건 신뢰가 가는 사랑일 때 가능한 것이지 신뢰를 잃는 사랑은 기억과 추억까지 다 도려내 버립니다. 세상에 남자는 많고, 소중한 사랑도 준비돼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어니스트 버크하트와 몰리 카일라, 그리고 윌리엄 킹 헤일의 세 인물을 통해서 아메리카의 비극이자 치부인 원주민에 대한 약탈과 탐욕을 비판한 것입니다. 로그라인으로 정리하자면 문명의 야만성이 되겠죠.



  넷째, 오세이지 부족의 죽음에 대한 세계관과 의식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자에게 나타나는 부엉이와 조상들의 환영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주적 생명관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오세이지 부족이 게으르다고 한 건 문명의 기준일 뿐입니다. 그들은 태양의 걸음으로 느릿하게 걷고,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차이들을 낳을 때 세계가 탄생하고, 차이들을 지울 때 세계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죠. 획일화된 강요는 폭력일 뿐입니다.  



  다섯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마치 부록처럼 생소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연극무대처럼 꾸며놓고 일종의 연예 쇼인 보드빌 형식으로 <플라워 킬링 문>의 서사와 뉴스기사를 요약해서 재현해 주는 겁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해서 스크린에 얼굴을 드러냅니다. 생경한 스크린의 문법이었습니다. 이미 다 끝난 스토리를 다시 요약해서 그 이후의 이야기까지 들려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니스트와 몰리의 서사에 매몰되어 비극적인 사랑의 종말로 받아들이는 관객들에게 일종의 소격효과로서 이야기를 비틀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비극적인 로맨스를 초월해서 문명과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 환원시키고, 확대하고자 한 의도였던 게 분명합니다. 인물의 서사에 매몰된 극적인 카타르시스보다 역사현실에 대한 지각력을 직접 호소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여섯째,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들려오는 사운드는 감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람소리가 들리다가 점차 앵앵거리는 파리소리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이내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지면서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코요테가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소리들은 인간의 생존과 기쁨의 원천인 자연과 우주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그 속에 존재하고, 그와 조화를 이룰 때 행복도 실현됩니다. 우리는 그걸 종종 잊고, 오직 돈에만 매몰돼 있죠.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을 때보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깨달은 뒤에야 사는 게 훨씬 즐거워진다는 걸 모르는 거죠. 

  법정 스님께서 강론을 마칠 때마다 했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제 이야기는 이게 끝입니다. 나머지는 바람소리를 듣고 깨닫기 바랍니다.”


  춘천 CGV는 관객이 나와 젊은이 두 명 뿐이었는데 그 젊은이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켜준 게  아름다웠습니다. 흔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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