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불능의 인생이라도 포기하지 말기를
우연히 영화를 봤습니다. <Crazy Heart>, 어떤 정보도 없었고, 그러니까 기대 같은 건 1도 없었죠.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서서히 몰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재미가 있어서라기보다 누렇게 바랜 벽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배드 블레이크(제프 브리지스)의 삶에 동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혼곤한 삶은 배드 블레이크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공평해서 철없이 나이 든 자들에게 눅눅한 외로움의 계산서를 여지없이 들이댑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리얼리티는 핍진성의 유무가 아니라 감득의 정도에 달려있다는 걸 깨닫고 또 깨닫습니다.
주인공 배드 블레이크는 한 때 잘 나가던 컨트리 가수였지만 지금은 소도시의 허름한 술집이나 볼링장에서 혼자서 기타를 치며 공연을 합니다. 57살 먹은 한물 간 가수. 환호 같은 건 옛날의 금잔디처럼 다 지나갔죠. 가끔 ‘저희 마누라가 팬입니다.’라고 영혼 없이 건네는 말만 있을 뿐. 청바지에 흰 카우보이 모자, 배드의 평생 동반자는 녹슬고 낡은 픽업 밴과 그리고 술입니다. 특히 그의 인생은 술에 빠져서 헤어 나올 줄 몰랐죠.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로 걷는 것조차 불안할 정도입니다. 침대에서 숨이 멎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죠. 그런 배드 블레이크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 지망생인 진(매기 질렌할, 제이크 질렌할의 여동생)을 만나게 되죠. 진은 이혼녀로 네 살짜리 사내아이인 버디와 살고 있었는데 배드의 집요한 구애에 연인이 됩니다. 행복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고압선 위의 비둘기처럼 불안해 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디 앞에서는 술을 마시지 마라.’는 진의 절실한 부탁이 허사가 되고 맙니다. 배드가 잠시 맡겼던 버디를 데리고 바에 들어가 술을 마시다가 아이를 잃어버린 사건이 일어나고 말죠. 아이는 간신히 찾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을 맞게 됩니다. 배드는 몇 번이고, 진에게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돌이킬 수 없게 되죠. 배드는 그 사건을 계기로 재활센터에 들어가 술을 끊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서게 되죠. 무대에 서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녹아 있는 노래까지 작곡하게 됩니다. 한물간 가수가 다시 무대에 서게 되고, 그의 인생이 녹아있는 노래는 청중에게 감동을 줍니다. 1년 6개월이 지난 후, 배드가 한창 인기 절정에 있는 가수 토미(콜린 파렐)의 오프닝 공연을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길 때 진이 다가옵니다. 목에 프레스 보안카드를 걸고 있었죠. 정식기자가 돼서 정식 인터뷰를 하러 온 겁니다. 그의 손가락에는 새로운 남자를 만났다는 증표인 반지를 끼고 있었고요. 진이 버디를 데리고 공연현장을 찾아왔지만 배드 블레이크는 버디를 만나는 걸 극구 마다합니다.
“버디 볼래요? 함께 왔는데.”
“보고 싶지만 아이를 위해선 안 보는 게 낫겠어.”
그리고 배드가 매니저로부터 출연료와 인세로 받은 수표를 버디가 18살에 되면 전해 달라고 진에게 건네주죠. 그리고 배드와 진의 마지막 대사가 이어집니다.
“잘 살고 있는 거지?”
“잘 살고 있어요.”
“나도 그래.”
<Crazy Heart>를 보면서 느낀 점
첫째, 뮤지션을 다룬 영화는 많습니다. <인사이드 르윈>, <앙코르>, <레이>, <스타 이즈 본>, <로켓맨>, <보헤미안 랩소디>, <비긴 어게인>, <원스> 등등. 그런데 <Crazy Heart>는 Thomas Cobb의 원작소설을 각색했지만 극적인 서사도 없고, 조미료 맛이 하나도 나지 않는 맹맹한 영화입니다. 그런 만큼 과장하지 않고, 뮤지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오프닝 씬과 라스트 씬으로 석양에 물든 미국 서부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보여주는데 인생과 자연의 조응이라고나 할까요.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고. 그런 우주의 시간 속에 인간은 그냥 흘러가는 순간적인 존재일 뿐이죠.
셋째, 컨트리 장르가 생리에 맞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는 내내 자신도 모르게 흥이 납니다. 컨트리라는 장르가 대지의 정령들이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넷째, 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제프 브리지스가 이 영화로 2010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라이언 빙햄이 <The Weary Kind>로 주제가 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The Weary Kind>의 가사와 멜로디가 귀에 딱 들어옵니다.
다섯째, 로버트 듀발이 술집 바 사장으로 출연하고, 콜린 파렐이 인기 절정을 구가하는 토미 역으로 나옵니다. 로버트 듀발은 그의 얼굴이 보여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영화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강에 보트를 띄워놓고 낚시를 하면서 배드와 나누는 대사는 인생 묵시록에 가깝습니다.
여섯째, 배드 블레이크가 자동차 사고로 차가 뒤집혀 병원의 침대에서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의 입에서 최초로 나온 말은 “내 기타는?”이었습니다. 가수와 기타는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곱째, 배드 블레이크가 결혼을 해서 28살이 된 아들이 있지만 그 아들이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다가 뒤늦게 전화통화를 하고, 만나자고 했을 때 단번에 거절당하죠. 결혼을 흔히 보험이라고 하죠. 하지만 보험료를 다달이 납부하지 않으면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합니다. “결혼을 했지만 가족이 뭔지 잘 몰라.”라는 배드 블레이크의 대사처럼 철없이 사는 어른들 참으로 많습니다.
여덟째, 배드 블레이크가 진에게 자신의 본명을 오티스라고 밝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 이름은 오티스야. 더 이상은 배드가 아냐.”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런 과거에서 빠져나와 진정으로 자신을 회복하는 의미로 볼 수 있죠. 황석영의 소설 <삼포가는 길>이 떠올랐습니다. 주점에서 빚 때문에 도망친 작부 백화가 떠돌이 사내인 정 씨와 영달과 기차역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자신은 백화가 아니라 이점례라고 밝히죠. 가명을 쓰던 사람들이 본명을 밝히는 건 영혼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수가 <The Weary Kind> 같은 인생노래 한 곡을 남겼다면 충분히 족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