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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Mar 16. 2024

최선을 다해 불행에 다가가는 중

- 겨우내 눌러놓았던 욕망이 터져 넘치는 봄날

염장이 친구가 있습니다. 엊그제 그한테 들었던 얘기가 계속 귓가에서 맴돕니다. 지난주 스물네 살 먹은 아가씨가 자살을 했는데 눈을 부릅뜨고 죽었답니다. 뭐가 그렇게 한이 맺혔기에 눈을 감지 못했을까요. 그녀의 눈을 감겨주면서 말했답니다.   

‘엿 같은 세상 실컷 봤으니 더 이상 볼 것도, 더 본다 해도 달라질 게 없으니까 이제 그만 눈을 감아요.’말하고 나서 보니 손가락이 육손이었다네요. 염장이 친구는 경솔하게 말한 자신의 입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었답니다. 다섯 손가락의 인간들은 육손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죽었다 깨도 모르죠. 결코.    


         

변비로 열흘 내내 고생했습니다. 화장실에 가면 옆 칸에서는 뿌지직! 열락의 소리를 내며 잘도 배설하는데, 내 엉덩이의 정령들은 왜 환희의 찬가를 부르지 못하고 꽉 막혀 있는지. 겨우 오늘에서야 대사를 치렀습니다.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인생을 통틀어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변기의 물을 내리며 외쳤습니다.  

“잘 가라. 어디든 너 꼴리는 대로 가서 살아라. 분노의 파도든, 센티한 보슬비든, 모호한 안개든 네 멋대로 살아라. 다시는 내 엉덩이로 돌아오지는 마라.”      


     

인간의 행위 가운데 남자한테 최고의 쾌감을 주는 건 쑤셔 넣는 겁니다. 앞이건 뒤건 따지지 않고 삽입하는 거죠. 고가의 섹스 돌이나 싸구려 모조 성기를 사는 것도 다 쑤셔 넣으려는데 목적이 있죠. 점심시간이면 모텔이 대실로 꽉꽉 차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죠. Y 유전자는 무조건 쑤셔 넣으려는 에너지와 전투력으로 늘 빵빵합니다. 수컷들은 존재론적으로 빈 구멍만 보면 눈에 생기가 돌게 생겨먹었다니까요.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굳이 부활이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은 삶의 대척이 아니라 삶의 일부란 걸 깨달으면 부활이 아니어도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으련만.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건 먹고 자고 싸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뿐입니다. 태양이, 바람이, 산이 부활하는 거 봤어요? 그냥 존재할 뿐이죠. 부활을 얘기하는 건 죽음의 두려움을 피하려거나 아니면 속물적인 쾌락을 계속 누려보겠다는 욕심인 겁니다.     


나 혼자 소중하다고 착각한 인간관계의 파탄, 석 달째 밀려 있는 카드 값, 복사지에 손을 베이고 책상 모서리에 정강이를 부딪쳐 멍이 든 불운의 연속, 오해로 결별한 그녀와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 훈장 같은 건 없는 아득한 추락의 날들. 누구나 다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라고 별 수 있나요. 그래도 위로가 되지 않아요. 전혀. 정말 희망은 없는 건가요? 희망요? 그건 더 위험하죠. 피도 눈물도 없으니까요. 모호하고 불확실하고 무모한 내일마저 그럴 듯한 거로 착각하게 하잖아요. 희망을 버리니까 희망의 고통이 사라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요. 어차피 다 사그라질 세상인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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