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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Aug 01. 2024

영화 <파일럿> 비록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S#1

  40년 전, 충무로 명보극장에서 K와 함께 시드니 폴락 감독의 <투씨>를 보았습니다. 연극영화학과 재학 중이던 K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몰랐습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화를 언제쯤 만드나.”

  지금은 영화로 밥벌이를 하는 K감독에게 <파일럿>을 보고 난 뒤, 어렵게 말합니다.

  “적어도 코미디 영화는 아직 멀었나 봅니다. 웃음은 많은데 감동은 아니거든요. 결국 스토리와 서사 구조 때문이겠죠.”     




  S#2

  김한결 감독의 <파일럿>을 보았습니다. 보기 전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감독의 전작인 <가장 보통의 연애>를 재미있게 보았거든요.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 웃음은 전적으로 조정석의 개인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스토리를 극적으로 전개시켜 가는 과정에서 긴장을 이완시키는 매개체로의 웃음이 아니라 해프닝에 가까운 웃음이었습니다. 조정석이 아니었더라면 <파일럿>이 어찌되었을까, 싶었습니다. 감독이 스웨덴 영화 <콕피트>를 리메이크했다는 건 오락성과 재미가 담보되었기에 위험부담은 줄일 수 있었겠죠. 하지만 리메이크 자체가 매력이 있고, 감동을 주느냐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체코 영화 <희망에 빠진 남자들>를 이병헌 감독이 <바람 바람 바람>으로 리메이크했지만 전혀 느낌이 다른 영화가 됐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를 스파이크 리 감독이 조쉬 브롤린과 샤무엘 잭슨을 캐스팅해 리메이크했지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죠. 좋은 원작을 리메이크한다고 해서 그 감동의 유전자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복제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변변찮은 원작을 리메이크해서 훨씬 뛰어난 작품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더구나 여장 남자 캐릭터가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핵심인 <파일럿>은 새로운 소재도 아니기에 그것을 어떻게 한국적 현실과 접목시키느냐가 관건이었을 겁니다. 한때 최고의 인기와 상종가를 구가하던 파일럿 한정우(조정석)가 성추행 사건으로 퇴사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어떤 항공사에도 취직을 하지 못하자 여동생 한정미(한선화)로 신분을 위장해 취업에 성공한 뒤, 직장에서 여성이 받는 차별과 편견을 타자역할(Role Taking)로 보여주는 스토리는 거부감도 적고, 극적 효용성은 최대치로 올릴 수 있는 소재인 건 분명하죠. 더구나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들은 스크린과 몇 가지 합의(Convention)가 이루어진 셈이니 제작부담도 적죠. 예를 들면 개연성이 적더라도 이해한다. 우연의  일치는 필연적이다. 여성으로 변장한 한정우의 한계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 현실과 극적 상황이 차이가 나더라도 수용 가능하다. 캐릭터의 오버 액션도 모두 다 오케이!      


  문제는 그런 합의를 해준 만큼 관객에게 되돌려줘야 할 메시지는 웃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남녀 차별과 편견의 문제를 좀 더 설득력이 있고, 적어도 문제의식은 던져줘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해프닝에 가까운 친절한 웃음 제공, 거기까지였습니다. 항공사에서 당하는 여성 차별의 문제를 너무 쉽게 외모 편향과 성적 희롱에만 초점을 맞춘 느낌입니다. 항공사라는 회사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구체성에 좀 더 치열하게 파고들었더라면 소구력과 시사성도 컸을 터인데 그런 건 없었습니다. <투씨>는 80년대 미국사회의 연예계에서 여자들이 당하는 피해를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드러냅니다. <파일럿>의 한국적 로컬화가 되긴 했지만 글로벌한 재미와 감동까지 이루었느냐는 데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S#3

  감동은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항공사 면접시험을 보는데 여성지원자가 웅변하듯이 강조하는 답변 속에는 우리 사회의 여성 차별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지만 그게 지나치면 오히려 진정성이 결여된 포즈일 뿐이라는 혐의를 받게 됩니다.     

  “결혼 싫습니다! 남자 친구도 없습니다! 임신도, 난자를 얼릴 계획도 없습니다!”

  이런 대답에 신뢰가 가지 않는 건 영화라고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김광식 감독의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세진이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이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춤추며 불러보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여성관이 차별을 넘어 능욕을 하는 수준이었죠. 여자가 여기저기 아무리 지원해 봤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죠. <파일럿>과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치부를 정확하게 드러냈고, 감동까지 주는 이유는 세진이 마지막으로 지원한 IT회사의 면접 장면에서였죠. 면접관이 세진에게 ‘기업의 중요한 정보를 지키고, 보관하는 데 있어서 회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물었을 때, 딱 부러진 답변을 합니다. 그 답변을 들은 면접관이 그렇게 정보에 대해 잘 아는데 왜 많은 회사의 면접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다시 묻죠.

  “그 어떤 회사에서도 이런 문제는 묻지 않았어요.”      

  저는 이 장면만 보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단 한 씬으로 핵심을 찌릅니다.

  <파일럿>을 보는 내내 <투씨>를 오마주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투씨>에서 마이클이 동료 배우에게 말하는 인상적인 대사가 있습니다.

  “내면의 인물을 만들어요. 남자, 여자란 성별에 구애받게 된다면 진정한 연기가 아니죠. 느끼지 못하면 연기가 안 돼요.”

  <파일럿>에선 가슴에 와닿는 그런 대사는 없었습니다. 또한 <투씨>의 마이클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도 기억에 남습니다.


줄리에 : 도로시가 그리워요.

마이클 : 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 있으니까.

도로시도 그리워해요. 나를 잘 모르겠지만. 당신과 여자로 지낼 때 더 괜찮은 남자였어요. 남자로서 여자랑 지낼 때보다. 무슨 말인지 알죠?

줄리에 : ……

마이클 : 이젠 여장을 안 해도 가능하도록 해야죠. 남자로서 당신 앞에 서고 싶어요. 고비는 지나갔어요. 우린 이미…… 좋은 친구잖아요.         

       


  S#4

  분산 투자보다는 집중 투자가 어땠을까. 내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가족 이야기를 줄이고, 좀 더 심도 있게 직장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캐릭터의 심적 갈등에 치중했더라면 사회적 메시지와 반행도 크지 않았을까. 그게 제작의도에 부합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족 이야기는 산만하게 느껴졌습니다. 스토리에 응집되어 긴장감과 흥미를 높여주기보다 거의 따로 떨어진 삽화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정우의 여동생이자 ASMR 뷰티 유튜버 한정미의 일상이나 트롯 가수 이찬원의 덕후이자 맛집 성지순례를 하는 한정우의 어머니 안자(오민애)의 인생이 눈요기의 정보제공은 되지만 스토리를 묶는 결집력보다 오히려 이완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가족 구성원들을 통해서 한국적인 가족애를 보여준다는 것도 그렇게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요.



  S#5

  그래도 여전히 희망은 있습니다. 열정이 있는 연기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기자들한테 연기를 잘한다고 말하는 건 칭찬이 아니라 모독일 수 있습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건 기본입니다. 그 기본을 칭찬하는 건 ‘어, 이루마가 River Flows In You를 잘 치네.’라고 말하고, 교수형 집행관이 사형대에 오르는 죄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있고,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이 있는 연기자들이 있는 한 감동을 주는 스토리를 만드는 건 이제 작가의 의무이면서 숙제일 테죠. <파일럿>이 40년 전의 <투씨>를 뛰어넘지 못했지만 우리의 코미디 영화가 오스카 트로피를 받을 날도 언젠가는 오겠죠. 분명히.   


        


사족 - <파일럿>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 동네 버스 안에서 본 장면입니다. 할머니께서 차에 타자마자 연신 목이 마르다고 말하는 걸 운전기사께서 듣고는 길가에 버스를 세우고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를 사서 할머니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얼마나 목이 탔는지 거의 반병쯤 마셨습니다. 승객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동의 눈빛을 띄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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