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내 영화 취향이 변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상큼한 여운이 남는 그런 영화들이 좋습니다. 드니 빌뇌브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나 존 카니, 리처드 커티스 같은 감독의 영화에 구미가 당깁니다. 본 것 다시 봐도 참 좋습니다. 드라마이긴 하지만 존 카니의 <모던 러브> 같은 작품을 보면 이데올로기나 액션이 아니더라도 사랑 이야기로도 감동과 즐거움을 줍니다. 또 그런 이야기가 일상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죠. 살아가면서 연인을 만나고, 위기에 또 위기를 겪은 끝에 사랑을 이루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의 헤어짐조차 인생에서 피해 갈 수 없는 필연이기도 하죠. 하지만 사랑의 기쁨이든 실연의 아픔이든 그게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마음과 정서를 풍요롭게 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소중하죠.
어제 본 <한국이 싫어서>는 보는 내내 목이 말랐습니다. 마른침을 목울대로 넘기기도 힘들었습니다. 불편하지만 또 정서적으로 공감이 되기에 겪는 반응이었습니다. 20대 청춘들이 짊어지고 사는 취업과 결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통해서 내려진 ‘한국사회는 정상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계나(고아성)의 도발적인 행동은 리트머스 시험지에 나타난 우리 사회에 대한 반응인 건 확실하다는 점입니다.
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하지만 떠나는 게 만능일까요? 행복이 보장돼 있는 건가요? 그곳은 유토피아인가요? 그렇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바보이고, 멍청이네요. 더구나 코리안 드림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더더욱 멍청한 바보들이네요. 스스로 지옥으로 찾아오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다가 <한국이 싫어서>의 핵심적 전언은 떠나는 걸 통해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고자 한 거라고 정리를 했지만 여전히 씁쓸한 뒷맛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싫어서>를 보고 느낀 점 몇 가지 정리해 봅니다.
첫째, 이 땅을 떠나는 모티프에 대해서 몇 편의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최인훈의 <광장>. 관념 과잉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쪽에서도 월북한 아버지가 있는 북쪽에서도 유토피아를 찾지 못하다가 6.25 때 전쟁 포로로 잡혀 남쪽도 북쪽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하죠. 결국은 제3국으로 가던 중 타고르 호 배에서 자살을 선택합니다. 남쪽도 북쪽도 지식인에게는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는 없었던 게 한반도의 비극이었던 셈이죠. 이문열의 <영웅시대>. 일제 강점기 동경유학생인 이동영은 아나키스트에서 볼셰비키로, 볼셰비키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하지만 6.25 이후 청산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더구나 그의 연인인 안나타샤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이동영을 밀선에 타도록 음모를 꾸미지만 그녀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지막 순간에 이동영은 밀선에서 내립니다. 부정과 모순덩어리인 이 땅에 남은 거죠. 떠남은 목숨을 보장받고, 남는 건 미친 세월에 인생을 맡기는 것이지만 끝내 남습니다.
해방 전후 젊은이들은 이데올로기에 전부를 걸었지만 이제는 취업과 생존에 모든 걸 겁니다. 그래서 떠남의 모티프는 다양한 자본주의의 소비 욕망에 따른 개인적 형태이고, 때로는 현실도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우울했던 거죠. 떠난 자는 그렇더라도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뭐가 될까요.
둘째, 누구나 살아가면서 행복을 꿈꾸고 추구합니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게 정해진 수치가 있어서 거기에 맞춰야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계나처럼 인천 만수동에서 1호선을 타고 강남까지 출근하는 걸 못 견뎌내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수원 인계동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강남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잠실까지 기꺼이 출근하는 이도 있습니다. 어쩌면 행복도 비전도 없이 단지 그 순간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마저도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런 점에서 공무원시험 준비만 하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경윤(박승현)이 꿈에 나타나 계나에게 건네는 대사는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행복이라는 말이 왠지 과대평가된 것 같아.”
과대평가된 것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행복을 너무 과시하려는 건 아닐까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넘쳐나는 과시용의 사진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소비욕망과 시스템이 정말 우리의 행복을 실현해 줄까요? 모든 게 돈으로 수렴되고, 계층으로 인간성을 판단하는 건 폭력입니다. 생존의 방식과 삶의 방식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건 무지입니다. 건설현장에서 막일을 하면서도 클래식 음악을 즐길 수 있고, 택배를 하면서도 시를 쓸 수 있는 게 인생이니까요.
셋째, 계나의 삶은 인정하지만 인간적으로 끌리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분명 자아와 세계가 부딪치는 치열한 삶을 사는 문제적인 인물이라는 점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로 와 닿지는 않습니다.
“나는 배고프고 춥지만 않으면 정말로 좋다. 나한테는 그게 진짜 행복이야.”
이 대사가 참으로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그녀가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건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지나치게 물질에 민감하고, 그것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녀에게선 여유도, 유머도 없습니다. 절벽에 자일을 걸고 매달려 있는 극한의 절박함만 있을 뿐. 절박함을 절박하게 표현하는 건 그렇게 효과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준 건 전쟁포로수용소의 극한 상황에서 보여준 아이러니와 유머 때문입니다. 계나가 좀 더 당돌하고, 유쾌하게 뉴질랜드를 선택했더라면 언어장벽이나 문화차이, 인종차별 같은 문제들도 훨씬 더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장면들로 연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백인들이 마오리족을 점령했듯이 나는 뉴질랜드를 점령하러 간다!”
영화니까 가능하잖아요.
넷째, 뉴질랜드에서 사귄 앨리가 계나에게 했던 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목표가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목표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어.”
공무원 꿈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경윤, 행복전도사로 삶을 마친 채복희(정이랑), 뉴질랜드로 와서 제대로 정착했는가 싶었는데 자살로 끝낸 김태은(김지영) 가족. 그들의 목표가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끝난 삶이 돼 버리고 말았죠.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순간들이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고, 빛나는 겁니다. 게임이나 하고, 문제나 일으키는 미나(김뜻돌), 뉴질랜드에서 대학을 다니다 집어치우고 셰프의 길로 들어선 재인(주종혁), 신문기자의 삶을 사는 지명(김우겸), 재개발이 된 아파트에서 새 아파트에서 살며 그저 자식들이 잘 되는 게 유일한 소망인 계나부(이상희)와 계나모(오민애)의 삶이 그래서 소중한 겁니다. 세상에 시시한 인생은 없습니다. 단지 시시하게 여길 뿐이죠.
다섯째, <한국이 싫어서>의 핵심적 전언은 계나가 지명으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다시 뉴질랜드행을 선택하는 장면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은 처음 첫 장면에서 강조한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계나가 지명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한국에 산다는 건 안정적인 미래가 담보돼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뉴질랜드로 다시 간다는 건 언어와 문화의 장벽, 그리고 인종차별 같은 문제가 그대로 있는 불완전한 미래를 의미하죠. 그럼에도 뉴질랜드로 다시 간다는 건 현실도피가 아니라 도전이고, 자기 계발입니다. 그런 점에서 계나의 캐릭터는 극적으로 진보한 것이고, 까다롭고 고집만 있는 인물이 아니라 자기 의지와 주관이 뚜렷하다는 인물로 공감을 얻을 수 있겠죠. 리셋은 불가능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건 희망이고, 가능성도 있죠.
여섯째, <추위를 싫어한 팽귄>의 주인공 파블로의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또 다른 수많은 계나에게 용기도 주고, 응원도 되겠죠. 파블로의 이야기를 웹툰 형식으로 엔딩 크레딧을 구성한 건 스토리의 확장성과 완결성을 동시에 갖기에 눈길을 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