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언젠가부터 한국 영화가 도저히 볼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대지진처럼 한국 영화계가 무너졌다. 홀로 선 황궁 아파트처럼, 오랜만에 호평을 받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근데 이마저도 멀쩡한 아파트는 아니다.
주민1이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가 살해당하자 주민들은 바퀴벌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이후 바퀴벌레를 숨겨준 주민들을 찾아내 벌주고 바퀴벌레를 내쫓는 장면이 이어진다.
분노한 마음은 알겠는데, 관객 입장에선 비중 없던 사람이 죽은 것뿐이다. 나는 분노를 못 느꼈는데 저 사람들은 막 화를 내네? 인물의 감정에 동화되지 못하면 몰입은 깨지고 관망하게 된다.
관객이 직접 본 바퀴벌레 진영은 자기 슈퍼 지키다가 죽은 사람, 내쫓겨서 길거리에서 얼어죽은 사람들이다. 소문으론 인육도 먹는다고 하긴 하는데 그건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퀴벌레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주민들에게 공감하긴 어렵다. 내 기준에서 이때부터 확실히 몰입이 깨지고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명화는 도덕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박보영이 "아 내 배우 이미지가 착해서 이런 역할이 들어오는구나. 이병헌 박서준? 안 찍는다고 할 수도 없고.."하고 한숨 팍 쉬며 담배를 한 대 피는 장면을 상상해보자.(상상입니다. 박보영 배우는 비흡연자라고 합니다) 충격적이지 않은가? 도덕성의 극치를 보여줬다면 그 반전을 보여줘야 재밌지 않았을까. 적어도 조금의 변화라도 보여준다면 재밌었을 텐데.
사실 혜원이 등장할 때 이런 변화를 예상했었다. 아파트 바깥의 지옥을 경험하고 온 혜원은 태평한 주민들에게 여기 사람들은 바깥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서 미친 것 같다고 소리친다. 명화를 저격하는 말이다. 그녀가 도덕성을 챙길 수 있는 이유는 바깥의 죽고 죽이는 상황과 굶주림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의 변화를 혜원을 통해 보여줬다면 영화가 더 입체적일 수 있지 않았을까?
앞서 말했듯이 혜원은 명화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로 쓰이지 않았다. 약한 여성 둘이 만난다. 그러나 한쪽은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이고, 한쪽은 바깥의 지옥을 경험한 현실적인 인물이다. 양극단에 있는 두 인물의 만남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되었었다. 그러나 혜원은 그저 명화에게 진실을 알려 힘을 실어주는 인물로만 쓰고 버려졌다. 영화 진행 중에 새로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건 혜원뿐인데 그렇게 소비되는 게 너무 아쉬웠다.
아파트 사기를 당해서 가족과 이별했다.
So, 아파트에 집착하게 되어 황궁 아파트 주민들을 가족처럼 여긴다.
이 인과관계가 너무 어색해서 영화를 집중해서 볼 수가 없었다.
영탁이 사실 원주민이 아니었다는 반전을 준 다음에, 아파트에 너무 집착해서 그랬다고 설명해봤자 개연성이 없다. 차라리 영탁이 원주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초반부에 보여줘야 그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영화 <기생충>의 전개가 좋은 예시이다. 비밀을 속이는 인물과 관객만 알고 있어서, 들키지 않으려는 그 감정선을 관객이 따라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명화와 영탁이 싸우는 장면에서 갑자기 바퀴벌레에게 정문을 열어주는 아저씨. 나름대로 배신하는 장면을 빌드업했다. 수색대가 물건 잘 못 찾아오면 시비 거는 장면과 방범대보다 적은 배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을 넣긴 했다. 그러나 이것으론 부족하다.
사실 배신이라는 행위는 조연의 역할이 아니다. 그 배신이라는 행위의 대가가 클수록 그렇다. 조연이 배신하는 역할을 맡으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배신을 담당하는 배역의 감정선을 깊게 다루다보면 자연스레 배역의 비중이 커져서 조연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근데 난 이 아저씨 이름도 모른다고..
영화는 일단 재밌어야 한다. 재밌어야 그 안에 있는 의미도 찾아보게 된다. 왜 이병헌의 극 중 이름은 '모세'범이었을까(중간에 성경 구절이 나오는 장면도 있었던 것 같다), 엄태구는 왜 민성과 명화를 보고 따라가려는 제스처만 취하고 또 등장하진 않았을까, 명화는 엔딩 이후 어떻게 될까 등등을 생각해 볼 듯하다. 하지만 별로 궁금하진 않아서 찾아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