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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봄비-담 위에 떨어지는
살구꽃

by 허독


허난설헌. 봄비 – 담 위에 떨어지는 살구꽃








허난설헌은 천재 양천 허씨 집안의 여인입니다. 허씨 집안의 본은 다섯 가지가 있다 하나 모두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으로부터 생겨난 후손으로 같은 본으로 봅니다. 허균의 누나가 허난설헌이지요. 집안 11촌 오빠가 동의보감의 허준, 현대로 내려오면 수학 잘해서 2022년 필즈상 받은 허준이가 양천 허씨 집안이고, 조작가 권진규가 허준이 박사의 할머니의 오빠입니다. 필자의 친한 친구 허O회도 양천 허씨 이 집안 직계입니다. 역시 천재입니다.

이런 막강한 집안에서 태어난 예쁘고 머리 좋은 처자가 14세에 안동 김씨 가문에 시집을 갑니다. 외지 처자가 안동 가서 시집살이 하는 것이 어떤지 적령기 처자들과 안동에서 태어나서 자란 여인들은 다 압니다. 불행하게도 남편은 밖으로만 돕니다. 기생집에서 세월을 보냈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1589년 27세에 허난설헌은 요절합니다. 본명은 허초희. 남겨둔 시편과 그림들은 허균이 중국에 가서 중국 문화계에 데뷔 시킵니다. 중국인들이 모두 깜짝 놀랍니다. 이런 여인이 지은 시가 봄비입니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깨쳤으니 한시를 짓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春雨暗西池

輕寒襲羅幕

愁依小屛風

墻頭杏花落


맨 마지막 행의 “장두”는 담의 맨 끝 가장자리라고 합니다.
“행화”는 살구꽃입니다. 봄에 피는 꽃의 대표에 속합니다. 희거나 분홍색인데 수술이 길게 나와 있습니다. 홑꽃잎 다섯 장이 투명합니다. 피어서 며칠 뒤에 집니다.


위의 시를 해석하는 분들이 많으나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봄비 내리는 서편 연못은 어둑한데

찬바람 비단 장막을 펄럭거리게 하네

작은 병풍에 시름이 기대어 쳐다보니
살구꽃 담장 끝에 떨어지누나.


시 자체의 완성도는 기가 막힙니다.

봄이라고 하나 아직 약간 추운 날씨, 비가 와서 어두운 연못, 비단 장막을 가끔 펄럭이게 하는 찬바람, 이런 배경 아래에 드디어 터져 나오는 말 “내겐 걱정이 있어요”라는 고백, 그리고 담장 위에 떨어지는 살구꽃에 자기를 의탁하며 한숨을 끝냅니다. 이미지의 이동과 단어의 선택, 즉, 어두울 暗. 밀치고 들어오는 襲, 병풍에 기대는 依, 기어이 떨어지고야 마는 落, 모두,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밑줄 그은 부분은 맨 마지막 행입니다. 담장 위에 떨어진 살구꽃은 담장 안으로 떨어졌을까요? 담장 밖으로 떨어졌을까요? 왜, 살구꽃은 안채 정원의 연못 옆이나 우물 옆에 떨어지지 않고 담장 끝에 떨어졌을까요? 더 이상 캐면 이 영롱한 시인에게 지나친 질문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 시는 다 읽은 것입니다.


결혼은 왜 하는 것일까요? 서로 무한히 참으면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좋은 날은 지극히 짧고 나머지 날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투쟁, 힘을 합쳐 외부의 환경을 극복해 내는 투쟁을 해 나가야 합니다. 이 팀웍 구축 작업에 실패하면, 누구의 잘못이던 간에, 가지에 붙어있는 꽃이 되지 못하고, 담장 위에 떨어져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낙하/낙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릉 가거든 난설헌 허초희 할머니 묘소에 쏘주 한 병 부어드리고 싶습니다.

“할머니, 편히 쉬세요. 제가 이런 말 한다고 기분 나쁘지 않으셨지요?”하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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