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문법을 거부한 '세상'이라는 이방인
헤세의 작품을 연달아 읽으며 반복되는 주제의식에 살짝 질려갈 즈음, 카뮈의 <이방인>을 집어 들었다. 이 작품을 고작 스물여덟 살에 썼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문학 작품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지만, 나는 이 소설을 '무심한 세상과 희로애락을 가진 인간의 대립'으로 읽었다.
내가 해석한 뫼르소는 인간의 윤리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흐르는 강물이나 쏟아지는 폭포처럼, 인간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결로 작동하는 '세상'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였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를 아무런 인과관계없이 닥치는 '자연재해'로 해석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반면, 뫼르소의 대척점에 있는 재판부는 전형적인 인간의 방식이 지배하는 '인간계'를 상징한다. 뫼르소의 살인 사건을 다루면서도 정작 법리가 아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골몰하는 그들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소설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어머니의 부고를 들은 뫼르소는 슬픔보다 귀찮음을 느낀다. 회사 사장의 눈치를 보며 "내 잘못은 아니지 않으냐"라고 억울해하는 그를 보며, 처음엔 자기 삶에 함몰되어 슬픔마저 사치가 되어버린 냉정한 현대인을 표현하나 싶었다. 영화 <도쿄 이야기>나 <아무르> 속 자식들처럼, 부모가 그저 '책임과 의무'만 남은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관계 말이다. 나는 그저 싸가지 없는 아들이라 치부하며, 어머니와의 단절된 계기가 뒤에 나오길 기다리며 읽어 나갔다.
두 번째, 장례식 다음 날 뫼르소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해수욕을 즐긴다. 여기까지는 철없는 청년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웃 레몽의 복수를 돕기 위해 고민 없이 편지를 대신 써주고, 예상된 폭력이 발생함에도 말리지 않는 장면에서 일반적인 윤리의식을 벗어남을 느꼈다. 그는 그간 작품에서 보았던 일반적인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상하리만큼 인간적 윤리의식이 결여된 존재, 그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세 번째, 해변에서 아랍인과 마주친 뫼르소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태양이 눈을 찔러서"라는 짜증스러운 이유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하지만 첫 발 이후 이어진 네 발의 총성은 단순한 우발적 사고로 보기 어려웠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재판에서, 재판부는 살인 행위 자체보다 그가 얼마나 인간미 없는 냉혈한인지를 증명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마지막 네 번째, 사형을 앞둔 그에게 사제가 찾아온다. 영화 <데드맨 워킹>의 주인공처럼 죽음 앞에서 무력함을 인정하고 신에게 귀의하는 게 일반적인 사형수의 문법이지만, 뫼르소는 달랐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상관없다며 신을 거절하고, 감방 창살 너머 별밤을 보며 혼자 중얼거릴 뿐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확신했다. 그는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인간사의 작동 방식과는 무관한 자연현상으로서의 '세상'을 상징한다는 것을.
인간들은 이런 무심한 세상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은 먼지나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이 허무를 견딜 수 없어서 종교를 창조하고, 윤리를 개발하며 굳이 인간만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 눈물겨운 노력을 무시하듯 서 있는 존재, 즉 뫼르소는 인간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불온한 진실' 그 자체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