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

영화 [킹메이커]를 보고

by 노정희


고무줄놀이, 인형놀이에 골몰하고 있던 꼬맹이 시절, 9시가 되면 ‘띠-띠-띠-’ 하는 전자음이 들린 다음 9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아나운서 아저씨는 특유의 억양으로 "오늘 전두환 대통령 각하는" 라는 멘트로 뉴스를 어김없이 시작했다. 나는 그때 우리나라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 각하"만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이 대통령인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은 공포의 주걱턱 이순자 어쩌고저쩌고 그랬는데, 나는 이순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같이 놀려 댔다.


어느 날 나의 단골 놀이터에 불청객 같은 사진 여러 장이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대통령 선거 포스터라고 했다. 대통령은 전두환 각하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포스터 사진 중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노태우고,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TV를 틀면 "나 보통사람 노태우는" 어쩌고 하면서 자주 나왔던 것 같다. 다른 후보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TV에서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인상 좋은 보통사람이 제일 좋다고 친구들과 떠들어 댔다. 어느 날, 우리 동네 통장 아줌마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바가지 같은 걸 나눠줬던 것 같은데, 그때가 아마 그 선거철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자신을 왜 보통사람이라고 소개했는지 그 연유를 알지도 못한 체 선거는 진행되었고 보통사람은 대통령이 되었다.


얼마 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수도 "서울"을 "쎄울"이라고 발음하는 스페인 출신의 IOC 위원장이 "쎄울은 쎄계로 쎄계는 쎄울로"라고 어눌한 발음으로 외치면서 88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가슴에서 국뽕이 차올랐다.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난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에서는 올림픽에서 했던 매쓰 게임을 코찔찔이였던 우리에게 시켰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이상한 색깔 코팅용지를 들고 여기로 줄 섰다, 저기로 줄 섰다 각을 맞춰대었다. 열을 잘 못 맞추던 나와 어린 친구들은 선생님에게 여기로 끌려가고 저기로 끌려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또 얼마 뒤, TV에서는 내가 좋아하던 보통사람과 영원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할 것 같았던 전두환 각하가 파란색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받는 모습이 나왔다. 그 뒤로 백담사라는 곳에서 공포의 주걱턱과 함께 가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무식한 나는 모든 게 신기했다.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정치는 1도 몰랐다. 선거의 의미도 제대로 몰랐고 좋은 회사에 취업해서 월급을 타는 것이 나의 지상과제였다. 대학시절 학생 운동하는 곳에 몇 번 끌려갔던 적이 있었으나 전경이 어쩌고저쩌고, 최루탄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통에 무서웠다. 거긴 내가 갈 곳은 아니라고 판단을 해버렸고, 나는 사회문제에는 일절 귀를 닫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우리나라 수도를 이전하겠다고 공약을 냈다. 나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저 사람 바글바글한 서울이 싫어 수도를 좀 이전했으면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 뒤로 각종 뉴스, 신문에는 노무현이 뭘 잘못했고, 대통령 감이 아니라는 뉘앙스의 기사로 도배가 되었고 난 무능한 이미지의 그가 싫었다.


세상의 어떤 문제만 생기면 다 노무현 탓이라고 하던 지긋지긋한 시절이 끝나 갈때 쯤 이명박이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현대건설에서 잔뼈가 굵었고 청계천을 밀어붙여 없애버렸다. 서울시장인 시절, 버스와 지하철을 하나의 교통카드로 환승하도록 만들었다. 한마디로 무능한 노무현을 잊게 만들 강력한 히어로였다. 그가 대통령을 하면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잘 살 것 같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BBK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는데 귀 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히어로였으므로...


그 히어로는 당당히 대통령이 되었고 광우병이 있을지 모를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겠다고 했다.

앗, 난 무서운데... 광우병이 걸리면 뇌가 스펀지처럼 변한다던데... 먹기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자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언론이 통제되고 있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내가 알던 유명 연예인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정권에 찍혀서 그렇다고 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정치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정치는 중요하다. 생각보다 꽤 중요하다.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영원히 대통령만 할 줄 알았던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518 사태에 시민들에게 사격을 지시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보통사람 노태우는 전두환의 특수 관계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선거철 왜 내 눈에 보통사람만 들어왔는지, 다른 후보들은 왜 TV에서 얼굴도 볼 수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의 나쁜 일은 모두 노무현 탓이었던 무능했던 대통령 노무현은 많은 시민들에게 울림을 주는 몇 안 되는 대통령 중의 하나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다시 선거철이다.

누구의 공약이 나의 삶에 더 도움이 되는지 비교하기보다 어느 후보의 흠결이 더 많은지 비교해야 하는 씁쓸한 선거판이다. 이런 선거판이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영화 킹메이커가 개봉했다.


영화 [불한당]의 세련된 연출 감각을 뽐내던 변성한 감독의 영화인데, [불한당]만큼의 세련된 연출은 보기 어려웠으나 좀 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좋았다. 감독이 나이가 들수록 영화도 성숙해지는 모양이다.


영화는 희대의 선거 전략가 서창대라는 인물을 따라 어떻게 선거판이 좌지우지되는지 보여준다. 천만다행히 도 서창대는 김운범(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인물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그를 돕는다. 그 만의 방식으로...

여당의 물량공세로 인하여 번번이 낙선하던 김운범은 서창대의 천재적인 전략으로 선거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모두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을 때 서창대는 자신도 공천을 받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망을 들어낸다.


선거 과정 내내 김운범과 서창대는 선거 전략의 정당성 문제로 충돌한다.

김운범은 과정과 결과 모두 공정해야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는 반면에 서창대는 정의로운 사회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방식이 어쨌든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는 그 신념의 충돌에 집중하며 관객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서창대라는 인물에 조금 더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의 방식은 정의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 그도 마땅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 데 번번이 김운범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김운범은 서창대라는 천재가 욕망에 눈이 가려지게 되면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정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서창대의 인간적인 모습이 안쓰러웠다. 또 번번이 좌절되는 그의 욕망도 안타까웠다.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이 정당하지 못해도 괜찮은가?


서창대에 감정이입을 했던 나는 수단이 정당하지 못해도 목적이 정당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마블 영화의 히어로들처럼 강력한 한 방으로 악당들을 물리쳤으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넷플릭스 [지옥] 시리즈를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수단이 정의롭지 못하면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해 끝내 괴물이 된다는 메시지에 납득되었기 때문이다.

영화[킹메이커] 상의 박정희 정권 측 사람들도 그렇다. 그들이 말하는 목적은 어쩌면 정당하다. 경제를 빠른 시간 안에 개발하기 위해서 강한 리더십이 필요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정의롭지 못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어쩌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괴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서창대라는 천재적인 전략가도 이런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끝내 김운범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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