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전문상담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2020년부터 마침 코로나가 터져서 아이들과 평범한 학교생활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소풍이나 체육대회, 학교 축제 등이 줄줄이 취소되고 아이들의 온전한 얼굴을 마주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되었다고 좋았던 것도 잠시, 교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이 들 때가 많더군요. 그런데, 위기 사안들을 만나 쫓아다니느라 헉헉거리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아주 가끔 ‘이럴 때는 교사할 만하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비록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문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들은 먹물이 스르륵 번지듯 좋은 기운으로 제 마음을 물들여주지요.
- 최강 운동실력자 태호 -
할머니 품에서 자란 태호는 거의 대학생처럼 행세합니다. 학교를 제 맘대로 오가는 게 취미이지요. 코로나 덕분에 사이버 수업으로 1학년은 겨우 보냈는데 2학년이 되어 등교하게 되니 매일 아침 일어나기가 괴롭습니다. 전날 밤에도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친구들과 피시방에서 게임하다 일찍(?) 귀가해서 몹시 피곤합니다. 알바를 하면 돈이라도 벌 수 있는데 학교는 돈도 주지 않으면서 자꾸 오라고 귀찮게 하니 이참에 그냥 학교 관두고 배달 일이나 하면서 돈이나 벌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네요.^^;;;;;;
자퇴하고 싶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린 후, 보호자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할머니는 완강하게 반대하다 못해 기절하기 직전입니다. 사회에 나가면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한다며 손주에게 싹싹 빌며 사정을 하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태호가 아기 때부터 먹여주고 씻겨주고 친구들이 놀리면 당장 달려가서 혼쭐을 내주던 할머니입니다. 그 할머니를 사랑하는 손주는 마지못해 겨우 마음을 접지만, 매일 학교로 와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죽을 맛입니다. 학교에 와서 툭하면 맘대로 조퇴해 버리고 피시방에 가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마음을 못 잡아 졸업을 제때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저는 어느 날 학교 체육관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전교 배드민턴 대회 예선전에서 태호가 날렵하게 움직이며 셔틀콕을 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셔틀콕이 날아가는 속도가 마치 광속의 야구공 같아서 저 공에 맞으면 큰일 나겠다 싶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요. 알고 보니 태호는 배드민턴 천재였던 것입니다. 공부에 관심이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저는 복지쌤과 체육관 가장자리에 퍼질러 앉아 “우유빛깔 김태호!!”를 연발하며 목이 쉬도록 응원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지고 감동적이어서 살짝 울컥했다는 것은 우리끼리 비밀입니다. 열중하는 사람의 눈동자, 진지한 표정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실, 태호는 저의 존재에 대해 일절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상담 한 번 하고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지요. 저는 저대로 애정이 있는데 아이가 상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었는데 복도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도 안 하고 지나가더군요. 조금 서운했지만 괜찮습니다. 종종 아이들은 상담실 이외 장소에서 상담쌤을 만나면 아는 척하기를 꺼려하지요. 친구들이 자신이 상담받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러는지 혹은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태호는 그냥 상담쌤이라는 존재를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완전한 타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멀리서 지켜볼 뿐입니다. 누군가 태호의 삶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요.
- 욕쟁이 복면가왕 ‘오소리여왕’ -
욕을 밥 먹듯이 하는 고딩들을 만난 적이 있으실 겁니다. 욕이 그냥 일상인 영경이는 입만 열었다 하면 만화 사오정 입에서 나방 나오듯이 쌍욕을 쏟아내는 통에 제가 참 잔소리 많이 했습니다.
“너 방금 또 욕했잖아, 위클래스에 있을 때는 이쁜 말 쓰기로 쌤이랑 약속했으면서!”
“저 욕 안 했어요. 진짜예요!!”
라며 우깁니다. 제가 분명히 방금 쌍욕을 똑똑히 들었는데 얼마나 무시로 뱉어대는지 자신이 욕을 한 줄도 모르다니요.
아무튼 영경이는 몸 이곳저곳이 자주 아프면서 결정적으로 자해를 많이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연계하여 우울 불안 관련 약물 치료도 병행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이 친구도 저의 VVIP인 거지요.
잠깐, 여담을 드리면 요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약 처방받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잠을 잘 못 자서, 혹은 갑작스러운 상실이나 트라우마 등으로 각기 다른 사연들이 있지만,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물과 상담을 병행하는 것이 예후가 좋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는 보통 5분 내외로 약 처방 위주의 진료가 진행되지요(별도의 상담 비용을 지불하고 상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주위에 누군가 마음이 힘들어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는 분이 있다면, 요즘 나라에서 전국민마음투자사업으로 상담 비용을 지원해 주니(본인부담 차등) 상담을 받도록 추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영경이는 자연스레 저의 VVIP가 되셔서 상담도 하고 날씨 좋은 날에는 같이 산책도 했습니다. 진로도 나름 명확해서 대학 준비도 잘하고 있는 편이었는데 가끔 친구 관계가 틀어지면 훅 무너져서 마음을 추스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A가 알고 보니 뒷담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이런 얘기를 전해주는 제3자가 꼭 있는 법). 이 얘기가 소문이 나서 다른 친구들까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본다면서 속상해하고. 이런 버거운 상황을 감당하기 버겁다 보니 자해를 반복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여학생들 무리에서는 뒷담화로 갈등이 발생하고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던 연말, 코로나 시대가 종식되고 제가 근무한 지 3년 만에 학예회가 개최되었네요. 애들이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아이돌 같더라구요. 아니 쟤들이 학교 주변에서 담배 피우다 걸리고, 교실에서는 맨날 엎드려 자던 걔네들이 맞는지 의문이 들더라니까요. 얘들아, 그간에 이 넘치는 끼들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느냐.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치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학예회 마지막 순서는 대망의 ‘복면가왕’이었지요. 노래는 또 왜들 그렇게 잘하는지 다들 무대 체질인가 봅니다. 나중에 오픈채팅으로 투표를 하고 최우수 복면가왕을 기다렸지요. 드디어 복면가왕이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저의 작은 눈은 확장이 되며 앞으로 튀어나오고, 박수를 치던 제 두 손과 몸은 얼음이 되고 말았답니다. 가수 뺨치게 발라드를 열창하던 ‘오소리여왕’은 바로~ 욕쟁이 영경이였던 것입니다. 헉. 이럴 수가. 제가 알던, 마음이 여리고, 친구 때문에 힘들어서 울고 웃던 그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시원시원하게 남은 노래를 열창하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인가요. 또 울컥 올라옵니다.
욕 좀 하면 어떻습니까. 자해도 안 하면 좋겠지만, 그게 그리 자신의 힘든 마음을 내보내는 또 하나의 신호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노래방에서 열심히 연습했다고 하더군요.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달려가서 ‘멋짐폭발.’, ‘감동백배’였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성취감을 느낀 사람의 환한 표정은 빛이 납니다. 영경이가 그랬습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요.
상담에서는 작은 성공 경험이라도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너의 성공 경험을 찾아보자’라고 하면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보통 성공 경험이라고 하면 엄청난 무언가를 떠올리기 때문에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어른들의 경우에는 좋은 직장, 연봉, 집, 차 등등과 연관이 높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은 학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거나 특출 난 재능이 없으면 자신에게는 성공 경험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믿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누구나 많은 성공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고 치부할 뿐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저의 성공 경험 하나를 짧게 소개해봅니다.
때는 2012년도 봄, 저는 출퇴근 거리가 먼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버스 타고 다니기가 너무 힘이 들어 200만 원짜리 중고차 리오를 지인에게 구입해서 장롱면허를 탈출한 시점이었지요. 참고로, 저는 공간지각능력이 매우 뛰어나게 저조하고, 위기상황판단능력은 특출 나게 모자란 사람임을 알려드립니다. 운전을 시작하고 1주일 만에 앞에 신호 받고 있는 소나타 차량(부부동승)을 받아서 접촉사고를 냅니다.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그나마 큰 사고가 아닌 것을 위안했습니다.
그다음 주가 관건인데 퇴근길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마주 보고 내려오는 차를 보고 양보한다고 후진해서 비켜주다가 제 뒤로 지나가는 422번 버스를 쳐버리고 말았네요. 어쩔 줄 모르고 얼어있던 제 모습을 떠올리기가 참...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수리비가 80만 원. 다음 해에 보험료도 엄청 올랐더군요. 안 그래도 운전에 자신 없었는데 더 소심해졌지요.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다른 사람들은 잘만하고 다니는데 나는 2주 사이에 사고를 두 번이나 내고, 운전을 괜히 시작했어. 머저리 같은 인간. 정말 한심해’. 자괴감에 쳐진 고개를 들 힘도 없었지요.
더 큰 문제는 제가 퇴근길에 그 오르막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가까운 그 길을 두고 빙 둘러서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달 하다 언제까지 돌아서 집으로 갈 거냐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넌 역시 머저리가 맞아’ 스스로 비하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싶어서 다시 그 길을 도전했습니다. 또다시 그때와 동일한 상황은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심장이 날뛰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후진 기어를 확인하고, 뒤편 상황도 백미러로 확인하면서 천천히 천천히 집중하다 보니, 지금도 여전히 운전을 잘하지는 못해도 그 길만큼은 큰 두려움 없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성공 경험입니다.
비록 우리보다 짧은 생을 살아온 아이들에게도 성공경험은 분명 있습니다. 태권도 승급심사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애썼을 수도 있고, 노래방에서 노래 100점을 받은 적도 있고,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챙기고 돌본 경험도 있고, 짧지만 1주일간 금연해 본 경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목적의식, 인내, 도전, 배려, 책임감 등 넘치는 강점을 발견할 수 있는 성공 경험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단면만을 보고, 우리의 잣대를 들이대며 빠른 결론을 내립니다. 쯧쯧 혀를 차고 한심한 눈빛을 보냅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릅니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이 아이가 앞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할지.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나는 내 삶에, 지금 이 순간에, 과연 집중하고 있는가’ 하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