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저를 곤혹스럽게 하는 또 다른 내담자 유형은 ‘선택적 함묵증’을 가진 아이들입니다.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상황이나 조건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불안장애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제가 만난 이들은 학교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어른들에 의해 의뢰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 말을 하지 않는 아이들,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된 이후에도 마스크를 쓰고 여전히 침묵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한 학생들이 제법 있습니다.
집에서는 활발하게 혹은 거칠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학교에서는 쥐 죽은 듯 있는 학생들도 있고, 거의 모든 상황에서 말을 아끼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선생님이 질문해도 답하지 않고, 주로 혼자 있거나 소수의 친구와만 대화를 합니다. 기질적으로 예민해서 쉽게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통을 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침묵이 주요 의사소통하는 방식입니다. 가끔 감정적으로 사사로운 이벤트(?)를 벌이기도 하는데, 아이를 마주해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다 해도 그 속내는 오리무중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자발적으로 겨우 상담실에 모셔 오기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상담을 이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는 일상생활에 별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만 주위 사람들이 ‘쟤는 말이 너무 없으니까 뭔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군.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라고 넘겨짚고, 그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고 싶은 욕구들이 아이의 마음보다 앞서 나가게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때로는 차라리 말이 많은 내담자가 더 수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말을 자르기가 쉽지 않지요. ‘버스 몇 번을 타고 어디서 내려서 다시 몇 번 버스를 환승해서 어느 정류장에 내렸는데 너무 더워서 편의점에 들러 무슨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고요, 요즘 가격이 올라서 얼마더라, 근데 음료수 하나 더 먹어도 돼요?’라는 식으로 줄줄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통에 어떤 날은
“그 이야기가 지금 네 마음을 이해하는 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니?”라고도 해보고,
‘얼마나 말할 친구가 없었으면 저리도 말 폭격을 쏟아낼까?’ 싶어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가만 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비록 함구증에 해당하는 친구들이 말을 밖으로 꺼내는 상황을 취사선택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상당히 담겨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내면의 욕구를 잘 끌어내는 것이 상담자의 기술이고 역할인데 저의 경우에는 참 녹녹지 않습니다.
일단 말을 하지 않는 친구들은 아주 간단한 질문 하나에도 답을 하는 데 아주 오래 걸립니다. 상담쌤은 상대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답을 기다립니다(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 넷, 다섯... 초 단위로 헤아리며).
상담쌤: “지금 원래는 무슨 수업시간이야?”
내담자: ...
상담쌤: “음, 그러면 오늘은 우리 이 만다라 그림 색칠하면서 이야기해 볼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열하나, 열둘...)
내담자: ... 네.
이 몇 분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질문을 다시 해볼지, 좀 더 기다려볼지,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나? 인내하는 척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 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오리처럼 물밑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심정입니다.
바로 지금이 주문을 외워야 할 때입니다.
이 내담자가 하필 지금 내게 온 것은, 나로 하여금 인내를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게는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하다.!!
즉각적으로 반응을 기대하는 욕구를 내려놓자.
좀 더 기다렸다가 답할 수 있는 저들의 진중한 태도가 내게 꼭 필요하다!!
(아쉽게도 이 주문의 효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아서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이 침묵의 시간을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상담자가 초급인지 중급인지 판별할 수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함묵증을 가진 내담자를 처음 만났을 때는 답변을 사지선다로 제시하거나, 매체(찰흙, 모래놀이, 쉐이빙 폼, 색종이, 사진이나 카드 등)를 이용해서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일부러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게임을 유도하기도 했었지요. 이를테면 엄지손가락 두 개를 모아서 번갈아 숫자를 말하는 게임 같은 것인데 당시는 재밌게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상대를 너무 강제하려 했던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이를 온전히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점진적으로 이 침묵의 순간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내담자의 마음에 같이 머무르려고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상대 친구가 먼저 말문을 열고 상담을 이어가게도 되더군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내 앞에 있는 아이의 마음에 귀 기울이면, 그렇게 지루하지도 답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또 어떤 날은 그냥 침묵한 채로 한 시간이 지나가기도 했었지요. 이런 내담자를 상담하는 시간이 매번 어렵지만, 이제는 이 침묵 또한 내담자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또 다른 소통의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제가 근무하고 있는 위(Wee)센터에서 ‘학교 상담자의 소진과 예방’이라는 주제로 연수가 있었는데, 강사분이 강의를 끝내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상담선생님이 선택적 함묵증을 보이는 초등학생을 어떻게 상담할지 질문을 했지요.
강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학생이 왜 대답을 해야 하죠?”
...장내 침묵 5초...
‘아니 말 안 하는 아이를 말하도록 하는 게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저게 무슨 질문이야?’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까요?
강사분이 이후 강조한 얘기는 학생이 말을 꼭 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속에 우리가 파묻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 함구증으로 세상을 대처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안에는 우리가 경험하고 배워온 사회문화가 만들어놓은 틀이 있고, 아이들이 그 틀의 궤도에 맞추어 전진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담임선생님도 아이를 상대하기 힘들다고 도움을 요청해 왔으니 그 기대에 부응해야지’ 혹은 ‘아이가 앞으로 말을 하지 않으면 또래 관계나 학교생활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상담을 통해 말을 내뱉고 표현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이를 돕는 것이다’라는 관념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궤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올라서 있는 정상적인 루트이고, 그 루트를 벗어나면 이상하고 별난 문제아가 된다는 인식이 우리에게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그러한 낙인은 아이를 돕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입을 닫은 아이들을 만날 때, 더더욱 서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편안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주력을 두고 시간을 길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슈퍼바이저는 그림이나 글로 소통하는 것도 괜찮다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소통이 되는 상황을 만나면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표현하도록 격려해 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이 필요를 느끼게 되면 그때 표현할 수 있는데, 어른들이 조급증을 갖고 재촉하다 보면 불안이 높아지며 회피 성향만 높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 때, 말문을 닫게 되나요.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서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때.
더 이상 대화해도 답이 없을 것 같을 때.
얘기해 봤자 상대방이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때.
그냥 아무 얘기하고 싶지 않을 때.
차라리 침묵이 더 편하다고 느껴질 때.
저의 경우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아이가 상황에 따라 소통 방식을 선택하고 조절하고 있는 것도 자기주장에 대한 힘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고집이 셀 수도 있고, 호불호가 분명할 수도 있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너는 어떤 상황에서 얘기를 하고 어떤 상황에서 더 입을 닫게 되는지, 너의 묵비권이 관계를 좋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너는 어떤 마음으로 입을 닫은 건지 우리가 잘 들어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려놓은 세상의 공통범주에 속하기를 강요하지 않고,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제게도 속히 그런 관대함이 넘쳐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