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로 육아에 전념하다가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주로 계약직이었고, 처우도 빈약하기 그지없었지요. 노동부 위탁기관에서 근무할 때 갑질을 당하며 마음고생을 했던 적도 있었고, 한 대학교에서는 계약직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며 제 신세를 한탄한 적도 있었습니다.
더욱 씁쓸했던 기억 중 하나는 취업설계사로 일했던 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 1년마다 행해지는 재계약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서류와 면접까지 절차를 제대로 갖추어 진행했는데, 형식적인 순서가 필요할 수는 있으나 1년을 땀 흘리며 일해온 직원의 입장에서는 매번 서류를 준비하고, 관리자와 마주하는 면접장에 들어간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었고 큰 스트레스를 받고는 했지요.
‘나는 열심히 일해도 이런 대접밖에 못 받는구나’ 싶고, ‘이런 곳에서 계속 일해야 하나’ 회의감도 들었지요. 그나마 면접에서 탈락된 동료도 있었으니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약 2, 3년 전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어 그런 일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기계약직과 정규직의 차별은 여전히 만연한 것 같습니다.
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많은 차별과 불공평을 목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불가촉천민도 아니고 지금은 조선시대도 아닌데 어째서 차별은 여전한 걸까요. 교과와 비교과, 정규직 교(직)원과 기간제 교사, 교원과 공무직 등. 이외 학교에서 근무하는 인력으로 행정직, 시설관리인, 운동코치, 실무원(조리, 전산, 특수 등), 배움터지킴이 등 다양한 직종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상담쌤들도 전문상담교사(임용시험을 통과하였거나 전문상담교사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와 전문상담사(청소년상담사, 상담심리사, 전문상담사, 임상심리사, 사회복지사 등의 자격을 소유하고 공무직으로 채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도 학교상담자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구성원들로부터 때때로 차별적 시선과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발령받고 같은 부서 선생님들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한 선생님은 자신을 기간제라고 소개하더군요. 마치 ‘기간제’라는 단어가 자신의 정체성이라도 되는 양. 기간제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자신을 소개하는 데 ‘기간제’라는 단어가 수식하게 되었을까요?
“나는 기간제라서 큰 존재감이 없어요, 맡은 일도 적당하게 하면 되니까요. 책임감 따위는 개나 줘 버려요”의 의미는 아니었을 겁니다. 특별한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규교원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분명하게 기간제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그 공간에 보이지 않는 암막이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말에 학교에서는 부서마다 내년 업무분장에 대해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도 보이지 않는 알력이 많이 좌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좀 더 수월한 일을 맡고 싶습니다. 속 시끄러운 ‘담임’ 보직을 비롯하여 지도하기 골치 아프거나 민원이 자주 발생하는 일은 맡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정규교원이 원하는 업무를 선점하고 조율이 다 된 다음 남은 업무 중, 이를테면 학교폭력, 교권 보호업무, 선도 담당과 같은 일은 ‘기간제’가 맡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교폭력 담당이 교사들의 기피업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지요.
기간제 교사는 호봉 정기승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으며, 성과상여금이나 복지, 퇴직금 산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차별적 처우를 받고 있습니다. 정규직과 계약직을 대하는 차별적 시선은 피부에 와닿는 듯한 모멸감을 줍니다. 그들은 등 뒤로 번져있는 각각 다른 색깔의 아우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차별과 불공평 등은 만연합니다. 외모나 돈, 힘, 성적,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등으로 주류와 비주류를 본능적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알아서 기는 거지요. 찌질이들은 그냥 막 대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존재이며 반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은 절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주요 인물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학급의 분위기, 실세들의 파워 등)들로 인해서 내가 가진 개성과 특성, 이를테면 발랄함이나 주도성 등은 옅어지고, 기죽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학교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성별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뼛속까지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저 스스로도 남자 관리자 앞에서는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고 수그러드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있지요. 간혹 아이들 중에서도 저 같은 여자 선생님이 지도나 훈계를 하면 귓등으로도 새겨듣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도에서 싸우고 있어서 무슨 일이냐고 말리려고 하거나, 위클래스에 와서 감정조절이 안되어 행패를 부리는 경우에도 제 말은 무용지물인데 학생부장(남자)이나 다른 선생님(역시 남자)이 뭐라고 하면 그래도 듣는 시늉을 하며 말발이 먹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자라서 만만하게 보는 걸까요? 사람 좋은 상담쌤이 만만하게 보이는 걸까요?
어쩌면 주변 어른들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사람들이 인정받고 대우받는지. 세상이 얼마나 비열하고 치사하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미 본능적으로 알아챘을 수 있습니다.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고, 서열에 기반하는 수직적 조직 문화는 학교 내에 여전히 팽배해 있습니다. 그러니 존중이니 배려니 하는 듣기 좋은 단어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찾는 바람 카드를 고를 때 ‘공정’, ‘평등’과 같은 카드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키가 작다고, 말을 어눌하게 한다고, 가정형편이 어렵다고, 못생겼다고, 어떤 경우에는 아무 이유 없이도 소외당하고 또래의 무리들과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생활해 왔던 교실이나 학교는 부당한 일들이 판을 치는 장소로 경험된 것 같습니다. 조선미디어 더 나은 미래(2023.01. 30)의 기사에서는 청소년의 56%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실제 우리 모두가 체감하는 불공정의 비율은 훨씬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보일까 쉽게 넘어갈까, 원칙이나 규칙을 무시하고, 편한 대로 쉽게 쉽게 모면하려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 2회 상담을 해야 출석이 인정되는 학업중단숙려제 상담이나 학교폭력이나 교권침해 등으로 몇 시간의 특별교육을 받도록 처분받은 경우에도 한 시간 겨우 상담하다가 하는 말이
“쌤, 그냥 오늘 한 시간만 하고 4시간 한 걸로 퉁치면 안 돼요? 에이 좀 그렇게 해주세요.” 라거나 상담시간에 안 와서 연락을 하면
“쌤, 오늘 못 갈 거 같은데 그냥 이번 주 상담한 걸로 해주세요”라며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제가 뭔가 무리하게 강제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3학년 2학기 정도 되었는데도 학교나 학업에 별 뜻이 없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적잖이 만났습니다. 담임선생님 입장에서는 잦은 결석을 하는 아이라도 애정하는 마음에 어떻게든 출석 인정이 되도록 서류를 챙기고 겨우겨우 졸업을 시켜주는 사례도 몇 번 보았습니다. 사실 요즘은 서류상으로 근거를 명백히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게 쉽지 않습니다.
여하튼 학업중단숙려제 같은 상담도 예를 들어 4주 동안 주 2회 해야 하는데, 아이가 약속한 날짜에 안 오면 저도 시간을 변경해서 맞춰주고는 했습니다. 안 한 것을 했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상담을 하도록 최대한 협조해서 실제 상담을 실시한 경우는 날짜를 변경해서라도 학업중단숙려제 기간을 완수한 것으로 맞춰준 것이지요. 결석을 시킨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어른들의 봐주는 태도가 아이에게 결코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소그룹 슈퍼비전에서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하고 불성실하게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례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학생이 재원(財源)이다 보니 학점을 잘 주면서 재학을 유지하도록 유인하는 경우였지요. 이들이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그동안 살아온 대로, 자기 편한 대로 움직이며 여기저기서 주어지는 지원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확대해석하는 거라면 좋겠지만...
제가 이전에 편의를 봐주었던 아이들이 대학을 가게 되면 저렇게 지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외부 환경(부모나 주양육자 등)의 권유로 억지로 대학을 가기는 했는데, 이미 타인의 조력을 오랫동안 받아온 탓에 적극적으로 움직여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안되면 엄마가, 아니면 학교 선생님이, 어쩌면 행정 담당자가 어떻게든 처리해 주겠지라며 안일하게 맥없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부정(不正)과 비도덕을 심어주며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돌봄’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아이들을 방조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봐주기 가르침과 대충 넘어가는 태도, 힘에 굴복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자랐는데 어찌 그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 않아도 다 도와주는걸요. 정의를 외치면서도 불공정을 부추기는 두 얼굴의 공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한 번은 저의 VIP고객 중 한 명이었던 영태가 쉬는 시간에 와서 위클래스 소파에 앉아있었는데 다른 반 친구 예영이가 상담 예약을 하려고 들어왔더랬죠. 영태가 엄한 곳을 바라보며 혼자 하는 말이
“돼지가 뭐 상담받으면 뭐 달라지나. 지가 돼지면 돼지답게 살 일이지, 별일이네”라며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이 아닙니까. 예영이를 바라보며 한 말은 아니었지만 분명 예영이를 겨냥해서 한 말이라는 건 그 자리에서 있었다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막말을 하다니 참을 수 없었던 저는 영태를 따끔하게 나무랐지만,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영태 자신도 친구들 사이에 돌리기도 하며 놀림도 많이 받아 억울함과 분노가 많은 아이인데 어째서 다른 친구에게 그런 막말을 할 수 있는 건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혼쭐을 냈습니다. 그 장면을 가지고 상담장면에서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얘기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어물쩍 지나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한 마디 전해봅니다. 적다 보니 한 마디 보다 조금 길어졌네요. 히힛.
“영태야, 너 그때 예영이보고 했던 말 기억나니?
돼지가 상담받아서 뭐 하냐고 했던 말 말이야. 너도 친구들이 안 좋은 말로 놀리거나 하면 엄청 화나고 억울해했었는데 쌤은 그날 많이 놀랬어.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싶어서...
너 그때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설마 잘 기억이 안 난다고 오리발 내밀기 없기다. 이눔짜슥...
영태야, 우리는 적어도 외모로 사람들을 비하하지 말자. 그리고 너도 이제 성인으로 20대 초반을 보내고 있겠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원칙은 지키자. 필요한 경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요행을 바라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쌤이 자주 얘기했는데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작은 변화가 결국 큰 변화를 이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어. 네가 다른 누군가에게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그렇게 상대를 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