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든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하시더라고”
우리 삼 남매는 덩치가 크다. 아버지의 골격과 엄마의 하체를 쏙 가져왔다. 형은 175cm이지만 어릴 적 수영을 해 어깨가 넓고, 누나는 170cm라는 키에 어깨도 넓다. 나는 어깨가 넓진 않지만 180이 조금 넘는다. 그래서 가족끼리 어디를 가면, 차를 두 대씩 운용하곤 한다. 그럴 때면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운전 실력을 인정 받은 내가 운전대를 잡는다. 조수석에는 항상 형이. 하지만 오늘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부모님과 점심을 먹기 위해 ‘명가 한식 뷔페’라는 곳에 도달하기 위함이었다. 어찌됐건, 지금 이 공간은 밀폐되었고, 형은 어렸을 때부터 논술학원에서 책을 많이 읽었고 나보다 5살이나 많다. 아버지와 엄마를 닮아 꽤 잘생겼고 장남이라는 것이 여자들에겐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 연애 경력도 화려하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다. 그래서 나는
“여자친구 집에 데려다주면 왕복 30분인데, 그게 너무 귀찮아. 일주일에 3~4번은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 내가 내는 건 아니지만 기름값도 무시 못 해. 근데 어떡해 여자친군데. 태워다 줘야지. 내심 태워다준다고 하면서 거절하길 바라. 근데 또 막상 거절하면, 내가 또 거절한다? 내가 걔를 안 좋아하는 건가?”
내가 고등학생일 때, 형은 군대에 있었다. 누나는 대학 기숙사에. 아버지는 토목 감리사라는 신기한 직업을 가지고 계셨기에 주말에만 집에 오셨었다. 주말 부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한다나 뭐라나. 그래서 그 큰 집에는, 엄마랑 나뿐이었다.
형이 상병이 되었을 때쯤였을까, 어느샌가 엄마가 원래보다 늦게 출근하시기 시작했다. 어느 날처럼 등교를 준비하는데, 원래라면 비어있어야 할 안방의 화장대에서, “준희야, 언제 나갈 거야?”라고 하셨을 때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 이후로 덕분에 콩나물 버스가 아닌 언젠가 엄마가 갑자기 끌고 오신 에쿠스를 탈 수 있었다. 게다가 아침의 15분이라는 대단한 것을 선물 받았다. 그때는 아침이면 항상 배가 아팠다. 화장실에 15분 정도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등굣길에서 나는 괄약근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아침마다 화장실을 간다는 사실을 항상 잊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늦는다고 잔뜩 짜증 짜증을 내셨다. 엄마 회의 시간 늦는다고. 별 대화가 오가진 않았지만, 아침마다 엄마한테 물어봤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어요?”
“엄마 그럴 거면 그냥 약속 자체를 하지 마세요. 한두 번도 아니고, 짜증나게”
엄마는 항상 거짓말이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잘했어, 사랑해라는 말은 바라지 않은지 꽤 됐었지만, 미안해는 좀 해주면 안되나?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는 나에게 모든 것은 용서해줘도, 거짓말은 용서 못해준다고 귀가 닳도록 얘기하셨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부모님에게 말 못할 비밀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다 이해해주시고 용서해주실 것 같다. 이 문제로 최근 형이랑 차에서 자주 싸웠었다. 결과는 뭐, 비겼다고 해야하나. 여튼, 그때의 엄마는 거짓말이 너무 많았다. 아니 나누는 대화의 반이 거짓말이었다. 너무 짜증나고 너무 싫었다. 한두 번이어야지. 저녁 같이 먹자고 해놓고, 저녁 9시에나 왔다. 9시에 오면 일찍이지. 처음에는 엄마가 올 때까지 밥을 안 먹고 기다리다가, 오시면 배고프다고 짜증을 내기도 했었는데 오래 가진 못했다.
그때는 강아지 방 문을 열어주고 똥, 오줌을 대충 치운 뒤 거실에서 TV와 함께 음식을 탐내는 강아지들을 혼내며 저녁밥을 먹는 게 일상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거실에서 티비를 보며, 얼핏 봐도 4인 가족이 먹어도 되는 양의 음식을 차려놓고 “와,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라고 하며 음미는커녕 입에 쑤셔 넣고 있었을 것이다. 또 아버지 몰래 에어컨을 틀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 확실한 건, 그날 낮에 급식 먹고 나오는 길에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있는 친구들을 등진 채 엄마에게 폭언을 했다는 것이다. 날이 너무 더웠다. 물론, 욕을 한 건 아니다만, 나의 문자들에서 찾을 수 있는 그녀에 대한 존경은 어미들밖에는 없었다. 문자에 답은 아직 없었다.
결국 모든 음식들을 해치우고 치우지도 않은 채 소파에 누워 강아지를 인형 삼아 핸드폰을 구경하다, 이내 대충 치우고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누워있었는지를 서서히 잊어갈 때쯤, 또각또각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이 자식들은 나보다 인기척을 못 느낀다. 예전이었으면, 쫓겨나고도 남았어. 3초 후 왈왈왈왈. 난리다 난리.
“오셨어요?”
“응”
“주무세요”
7시 45분에는 일어나야 지각을 안하니까. 지금 자면.. 7시간은 자겠다. 그 여름 밤의 나는 잠에 들었다 깨는 건지, 눈만 감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30분 길면 한 시간씩 지나있었다.
“주유소 이제 팔 거 같아”
“그럼 엄마한테도, 좀 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엄마 차로 옮겨 타는 동안 신발 밑창에 묻은 질척거리는 더러운 회색 눈을 바라보며 이것들의 안녕을 바라고 있었다. 조수석에는 형이 타 있기에, 나는 뒷자리, 그중에서도 형의 뒷자리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좀 봐주고 있었거든”
“그렇게 데이고도요? 다시 들어가는 건 절대 안돼요 엄마”
그래. 절대 안되지.
명가 한식 뷔페는 천안 신당동에 있다. 나도 여기가 신당동이라는 것은 얼마 전에 알았다. 그냥 메가마트 주변이라고만 알고 있었지. 우리는 이제 수신면에 위치한 바푸리 푸드로 가고 있는데, 그러려면 천안의 시내를 가로질러야 한다. 금방 창밖에는 누나가 몇 개월 동안 카페를 운영했던 건물이 보인다. 누나의 이름을 딴 ‘cafe 소이’였다. 누나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엄마의 권유를 받아들였던 걸까. 대학생이 대학 다니면서, 그것도 서울로, 천안에서 카페 운영을 어떻게 하겠다고. 근데, 뭐, 누나 잘못은 아니라니까.
“근데, 그 빚 엄마가 잘못해서 생긴 거 아니라매요, 왜 갖고 나온 거예요?”
나는 엄마가 달에 버시는 돈의 반을 빚을 갚는 데에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근데, 그 빚이 10억이라는 것은 몰랐다.
순간 정말 관대해져봤다.
“이게 마음이 편해”
아니 왜? 엄마는 잘못 하나 없잖아. 엄마를 밤낮 괴롭게 만든 주유소 사업도 극구 반대하셨다며.
엄마는 1년만 더 고생하면 다 갚는다고 우리를 달래주셨다.
주유소 사건. 2013년 개업한 천안에서 가장 큰 주유소. 공장 할아버지의 사업 확장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천안 동남구 메가마트 뒤, 공장부지에 있는 ‘천안특장차’라는 이름을 가진 대형 자동차 정비공장을 중심으로, 성정동 롯데마트 앞 T-station. 그리고 논산 어느 곳의 대형 자동차 정비공장까지의 확장은 괜찮아 보였다. 덕분에, 딸기 고추장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까. 이거 밥에 비벼먹기만 해도 맛있거든. 쨌든, 이 주유소 사업 확장은 엄마가 그렇게 반대를 하셨단다. 근데, 공장 할아버지는 뭐에 홀렸던 걸까, 헐값에 준다는 지인의 말이었나. 망했다. 단단히 망했다. 어떻게 어느 정도로 망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를 보면 그 정도를 헤아려볼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 엄마는 여기서 꾼 돈을 저기로, 저기서 꾼 돈을 이리로, 돈을 굴리는 데 선수가 되셨다. 우리 아버지의 월급도 매달 고정적으로 천안특장차로 흘러 들어갔단다. 그러다가 집에 오시면 기절. 주말에는 안방에서 나오시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법원에도 몇 번 불려가셨단다-이건 엄마가 큰삼촌네 카페에서 동창들과 이야기하는 걸 엿들어서 아는 건데, 그때 엄마는 동창들과 신나게 말씀을 나누시다가 내가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셨는지 나를 보고 눈썹을 한 번 위로 올리시며 입술을 삐죽 내미셨었다. 이렇게 3~4년을 고생하시다가 끝내 퇴사하신 거다.
엄마에 대해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더 잘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올해 겨울에 돌아가셨는데, 긴 밤이 찾아 오면, 웃고 있는 할머니 앞에서, 연신 미안하다고 외치시는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가족끼리 삼삼오오 모여 외할머니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는 소주와 맥주 그리고 편육 같은 것들과 함께 1900년대의 천안 다가동,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북에서 기찻길을 따라 내려오다 할머니를 만났다는 그곳으로 떠났다. 외할머니도 엄마에게 수제 햄버거 트럭을 만들어주신 적이 있단다. 19살의 우리 엄마는 대학을 천안으로 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단다. 천안에서 대학 다니려고 공부한 거 아니라고. 그런 엄마를 할머니는, 단국대를 가면 집 1층-지금은 4층짜리 건물이지만 그때는 몇 층이었는지 모르겠다-에 화장품 가게를 차려줄 테니 천안에서 얌전하게 학교 다니라고 했다고. 물론, 이걸로 통하진 않았단다. 할아버지 말로 우리 엄마는 황소고집이니까. 엄마는 가출도 하고, 울며 불며 소리 지르고 별 짓 다 해봤다지만, 엄마는 누구 딸이겠나. 엄마는 결국 단국대학교에 입학하셨단다. 학기 초에는 학교에서 창피해 얼굴도 못 들고 다녔다고. 근데, 덕분에 내가 태어났다. 그해 여름이 와도 외할머니가 아무 말이 없자, 엄마가 난리를 쳤었단다. 그러자, 차려주신 게 수제 햄버거 푸드 트럭. 엄마의 요리 실력은 이때부터 빛이 났었나 보다. 그게 너무 맛있었어서, 이름 모를 삼촌들은 그거 먹으려고 한 시간씩 걸어 왔다고. 그들 이름을 왜 모르냐고? 이름을 듣긴 했는데, 외할머니는 8남매 중 장녀셨거든. 또 그때는, 밤이면 밤마다 집집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십상이었단다. 어느 밤 한 집에서 비명이 들리면, 다음 날 밤에는 그 옆집에서. 다다음 날에는 그 옆집에서. 그러다 뛰쳐나오는 비명의 주인들도 많았단다. 적지않은 충격이었지만, 뭐. 할머니는 엄마가 그렇게 살지 않길 바라셨었나 보다. 이제 큰삼촌이 서울에서 내려오셔서 할아버지랑 둘이 사신다는데, 모두가 걱정이다.
그러다 갑자기 누나가 하는 말이
“아까 공장 할아버지 온 거 봤어요? 어으 진짜 쥐어박고 싶었네”
“왜? 공장 할아버지 왜?”
공장 할아버지가 엄마를 너무 막 대해서, 엄마가 잠깐 그만두신 적도 있으시단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일 것이다. 원래였으면, 비어있어야 할 이른 오후의 집에, 엄마가 색을 알 수 없는 찰랑거리는 원피스를 입으시고 집 전화를 길게 늘어뜨리신 채, 피아노 의자 앞에 앉으셔서, 무릎과 팔꿈치를 맞닥뜨린 채 햇살을 맞으시며 하교하는 나를 반겨주시고, 간식을 해주신 적이 있다. 그때 집도 남향이었고, 날이 좋았어서,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정말 눈부시고 따스했지만, 그때 엄마의 미소만큼은 아니었다. 엄마가 그만두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장 할아버지는 외숙모, 그니까 공장할아버지의 아내, 를 데리고 집을 찾아왔단다. 무릎을 꿇었다나 뭐라나. 이에, 우리 아버지는 회사의 지분을 어느 정도 떼어 주는 게 아니면, 엄마를 안 보내겠다고 하셨다지만, 이내 우리 엄마는 그냥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셨단다.
엄마는, 두 번째 퇴사 이후에, 천안특장차의 점심을 책임지던 특장차와 멀지 않은 ‘명가 한식부페’라는 곳을 인수하셨다. 원래 운영하시던 분이, 어머니가 많이 편찮아지셔서 곁을 지켜주시려고 했단다. 엄마는 내가 군에 들어 갔을 때부터 나보다 일찍 일어나시고 내가 동기들과 실컷 떠들다가 잠에 들 때야 퇴근을 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엄마는 음식 솜씨가 많이 느셨다. 정확히 하자면, 폭이 넓어졌다. 전역한 지 얼마 안됐을 즘의 토요일 저녁이면, 한식 조리사 학원에서 배워 오신 처음 보는 요리를 해주셨다. 솔직히 맛은 그냥 그랬던 기억이 있다. 그냥 엄마가 돼지 전지로 볶아주신 제육볶음이 훨씬 맛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다음 날 아침 먹을 때까지 그 음식을 칭찬했다. 나는 그게 좀 요란을 부리는 것 같아 지켜만 봤지만, 아버지와 형의 얼굴에는 행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저번에 엄마가 다른 분이랑 얘기하는 걸 엿들었던 것인데, 나는 이걸 듣고 ‘엄마가 예전에 장수로 태어났었으면 어땠을까?’라고 상상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명가를 인수하시고 명가를 뜯어 고치실 적 얘기였다. 엄마는 명가가 이대로 두면 멸망할까 이미 몇 개 있던 대형 조리 웍-이것의 이름을 도통 모르겠다, 당신이 군필이라면 취사병이 삽으로 어루만지는 큰 지구본을 반으로 잘라놓은 듯한 조리형 팬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을 추가로 주문하셨었단다. 근데 웃긴 건, 해당 업체에서 무리하지 말라고 거절을 하려 했었단다. 그에 우리 엄마는 6개월이면 매출 두 배로 띄울 거니까 그냥 해달라는 대로 좀 하라고 했다고.
보란듯이 지금의 명가는 또 다른 멸망을 걱정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수신면의 어느 ‘바푸리’라는 이동 급식 전문 업체와 그 옆에 비어있는 지인의 자동차 정비 공장까지 인수하셔 잘 운영 중이시다. 어떻게 그 공장 옆에 이동 급식 업체가 있느냐고, 외할머니가 남겨주신 선물인 것 같다고 하신다. 엄마도 여자였다. 이 공장에는, 공장 할아버지의 공장의 부흥을 이끌었던 인물들이 와 있다. 빚도, 거의 다 갚으셨단다.
바푸리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찾아 주방으로 가니 아버지는 기물을 싸다 마시고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주셨다.
아버지는 직업 특성상 일이 없으시면 집에 계신다. 근데, 월급은 그대로 받으시고. 행정상으론 일이 있다나 뭐라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쉬시다가 다음 일이 잡히면, 일 따내시려고 일종의 발표를 준비하신다. 요즘 들어, 자꾸 뭐가 어긋나서 일을 못 따신단다. 원래 이건 길면 3개월이라는데, 우리 아버지는 코로나 시기를 통으로 이동 급식 배달 기사님으로 보내셨다. 본사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아버지가 2년 정도 쉬셨을 때, 본사가 드디어 평택의 한 회사로 출퇴근을 명령했단다. 근데, 가서 넷플릭스 보셨단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가끔 수세미나 벌레 같은 게 나오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음식 맛이 이상한 경우는 드물지 않는가. 우리 아버지는 이런 드문 경우에도 사장님에게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땐 그게 엄청 심하셨는데, 요즘은 좀 불만을 표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엄마가 문득 밤에
“창희 아빠, 기사님 코로나 걸리셨다는데 내일 좀 도와줄 수 있어?”
라고 하면, 아버지는 좀 머뭇거리시다 “응”이라고 달콤한 한 마디를 던지시고는 저 멀리 있는 휴대전화에 다가가 평택에 있는 사장-아버지와 입사 동기라 친구란다-에게 전화해 내일 일 좀 쉬어도 되겠냐고, 고맙다고, 다음에 술 한 번 먹자고 하시곤 한다.
“도와 드릴 거 없어요?”
“국 먼저 좀 실어줄래?”
그렇게, 국부터 시작해서 노란 플라스틱 박스 여러 개를 순서대로 포터 트렁크에 넣고 있었다. 그냥 트렁크가 아니라 냉장고 달려있는 트렁크다. 아버지가 알려주신 팁인데, 이때 허리로 드는 게 아니라 허리 핀 채 구부려 앉아 하체로 들어야한다. 아버지가 기물을 다 싸셨는지, 무릎을 구부렸다 피시는데, “하오~”라는 하이톤의 신음과 조금 과한 윙크와 노란 박스를 땅에 던지셨다.
“그냥 사람 한 명 더 구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이럴 때면, 아버지는 진통제 좀 가져오라고 하신다. 그의 말로 보자면, 그는 엄마가 ‘아내’여서 저리 본인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며 절실하게 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욕심일까. 헌신적으로 위할 만큼 좋아해서 ‘남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물론,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지는 관계들이 있다. 예전이라면, 얼굴 한 번 못 보고 결혼하는 부부들도 포함될 수 있겠다. 그것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행동의 원천이 일종의 계약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은 조금 슬프지 않는가? 내가 엄마가 엄마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엄마가 부디 공장 할아버지 때문에 그리 단단해지셨다고 해도, 아직까지 그의 일을 도와주고 있지 않는가? 근데, 아버지는 헌신적으로 위할 만큼 엄마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부부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거잖아. 군대 가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고 전역을 막 한 나에게 지금은 사라진 집 앞의 삼겹살 집에서 아버지가 소주 한 잔을 따라주시며 내게 물어보신 적이 있다. “어른이 하는 말은 다 이유가 있다는 거?, 근데 제가 인정하는 어른이어야 해요”. 아버지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과학적 증명을 필요로 하는 토론과는 다른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알약을 집어 삼키기엔 약간 과한 시원한 물 한 컵을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는 것뿐이다.
하나 남은 배달을 마치고 곧장 수신면 바로 옆에 있는 병천 순대 국밥 거리로 향했다. 배달하는 과정이 굳이 궁금하다면 짧게 말해주겠다. 트렁크에 있는 음식들을 모조리 회사의 식당으로 옮겨 가져다 놓고, 밥은 랲을 벗겨 전기 밥솥에 넣어놓고, 따뜻한 반찬은 온열 냉장고에 넣어놓고, 찬 반찬은 가지런히 정렬해놓는다. 국은 뚜껑을 벗겨 랲을 벗기고 다시 뚜껑을 덮은 후 버너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각 반찬에 필요한 식기 도구를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수저통을 나란히 올려놓으면 끝이다. 행주로 주변 한 번 닦아주면 좋다. 다시, 우리는 병천의 부부순대라는 국밥집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아버지가. 줄 안 서도 되고, 안 맵고 맛있다고. 얼큰이 부부순대였나. 간판이 너무 어지러워 알 수가 있어야지. 좀 큰 빨간 간판이다.
나는 모둠순대도 하나 먹자고 했다. 그러자, 엄마가 “그럼, 창희 아빠 나랑 하나 시켜서 나눠 먹어”. 아버지는 항상 “그래”. 그때, 영탁의 ‘찐이야’가 가게에 창피할 정도로 울려펴졌다. 범인은 우리 엄마의 캥거루 주머니 속. 주 메뉴가 안 왔단다. 기사님의 실수다. 기사님에게 전화 해보니 또, 자기는 제대로 배달을 했다고 한다. 누구의 실수지? 다시 전화해보니, 그쪽의 밥 아주머니가 온열 냉장고 맨 아래에 있는 음식 판을 못 보았던 것이다. 당장, 다시 바푸리로 돌아가서 배달 실수를 해결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한숨이 나왔지만, 다행이다. 엄마가 따로 설명해주시지 않아도 핸드폰 너머의 이들 음성은 거대했기 때문에 눈치를 챌 수 있다. 엄마가 왼쪽으로도 통화를 하셨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아버지의 분위기 띄어보려는 농담이 엄마는 내심 마음에 들었는지, 입으론 아버지를 비꼬지만, 눈가의 미소까진 숨길 순 없었다. 책상 아래로 보이는 아버지의 정강이는 자칫 보면 한 마리의 달마시안이 아버지에게 안아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듯하다. 엄마는 화장끼 없이, 앞치마를 매고 형이 매일 촌스럽다고 좀 벗으라고 하는 그녀에게 딱인 빨간 안경을 쓰고 계신다. 내가 남녀노소의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걸까. 빨간 테투리의 흰 배경, 그리고 빨간 꽃무늬가 담겨 있는 앞치마는 그녀가 평생 입었던 정장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