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6개월을 앞두고 이야기는 시작되어서 퇴직 후 3개월에 있었던 일을 서술한 내용이다.
주인공 토마스 해커는 베를린에 있는 잡지사 편집부에서 일한다.
첫 결혼 아내와 아들, 딸을 두고 있지만 이혼했다. 현재 아내 프란치스카와 재혼해서 산 지 20년이 되었다. 결혼 생활은 만족스럽다. 이따금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부부 관계는 일종의 우정, 해커가 예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깊은 우정을 키웠다. 서로를 탐하는 욕구가 물러나고 지속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결속의 감정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몇 달 뒤면 65세의 생일을 앞둔 3월 해커는 연금보험공단에 연금을 신청한다.
40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에서 퇴직하고 연금 생활자로 바뀐다. 우편물을 수령 한다. A4 규격 크기의 봉투 앞면에 ‘독일연금보험공단 베를린-브란덴부르크’라는 로고가 선명하다. 10월 1일부로 효력 발생, 카드 위에는 ‘연금 수령 자격 증명’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카드는 극장이나 박물관 또는 축구장의 입장권을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자격 증명 카드이자 해커의 미래 신분 증명 카드다. 태어났을 때는 유아 증명 카드를 목에 걸었었다. 이제 연금 수령 자격 증명 카드가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 들어왔다.
온전한 인격체는 인생의 한가운데에만 존재하고 어렸을 때와 늙었을 때 같은 가장자리에서는 대접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통지서 첫 장에 연금 수령액이 있다. 1,180유로라고 적혀있다. 독일 연금보험공단이 매달 해커에게 지급하겠다는 총액은 1,180유로다. 4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그것도 요양보험료 120유로를 공제하면 수령액은 1,060유로(한화 약157만 원 이)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으로 법원은 이른바 ‘연금 조정’을 결정하고 전처에게 연금 일부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현재의 연금 상황은 어렵다. 더욱 심각한 위기가 도래할 전망이다. 연금 생활자는 직장 생활할 때 받았던 급여의 60% 정도를 연금으로 받으며 2030년에 이르면 이 수준은 43%로 떨어진다. 인구 변화 추세가 변하지 않는 한 이런 하락을 막을 대안은 없다. 상황을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것은 오늘날 40대 중반 세대가 직면한 두 번째 위기, 곧 요양 비용의 폭발적 증가다. 갈수록 더 길어지는 평균수명은 연금뿐만 아니라 요양보험료의 급격한 인상이 불가피하다.
연금 신청하며 본 광경은 서글펐다. 폭삭 늙은 동년배의 얼굴, 속절없이 늙어가는 그 몰골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그럼에도 아직 젊다고 자부해 온 자신이 한심했다. 젊다는 것, 정확히 말해서 아직은 그렇게 늙지 않았다고 여기는 게 정말 주제넘은 짓일까? 아직 늙지 않았다고 볼 이유가 있지 않을까? 별것 아닌, 아주 사소한 이유일지라도. 아무리 봐도 자신이 늙은 얼굴과 잿빛 의자에 앉아 있던 동년배들의 폭삭 늙은 얼굴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내와 1년 전 등산을 갔을 때 심각한 일을 겪었다. 젊은 시절 해커는 지칠 줄 모르는 등반가였다.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웠다. 그 시절의 자신감은 이겨내지 못할 게 없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흡연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다. 체력도 자신감이 바닥 난 지 오래다. 햇살이 화창한 10월의 어느 날 해커는 등산하기에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몇 분 뒤 다리가 평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고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걸은 지 두 시간도 안 돼서 다리 근육이 아팠고 경련까지 났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며칠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접수를 보는 여자가 “여기 오시는 시니어분들은 밤낮으로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호호” 순간 ‘시니어’라는 단어가 유령처럼 공간을 삼켰다. 해커는 자신을 시니어라고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토마스 해커 ‘시니어’는 이제 아내의 경고를 들을 때가 되었다.라고 생각하며 헬스클럽에 등록한다.
그는 피트니스가 몸의 영역임을 알았다. 몸은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머리는 의심을 밥 먹듯 한다. 머리는 변덕스러워 몸의 간단명료한 법칙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몸이 원해도 머리가 관심을 잃으면 운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일의 상실은 단순히 일을 잃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을 잃는다는 건 곧 사람들과의 만날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 지금껏 협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교류는 이제 꺾이고 만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어떤 환상도 갖지 말자.
치아가 문제가 아니라 늙은 위장이 문제이다. 시니어 요리는 음식을 씹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양을 줄인 것이다. 특정 연령부터 사람은 너무 많은 걸 먹을 수 없다. 나이를 먹어가며 모든 것이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속상한 일이다. 귀만 빼고 모두 작아진다.
퇴직의 신호는 명함에서 온다. 현직은 명함이 있다. 전화번호, 소속, 직책, 성명이 적힌 명함! 누구를 만나든 명함을 준다. 그런데 줄 명함이 사라진다. 수시로 울리던 전화벨은 멈춘다. 가끔 전화가 고장 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지만, 현실은 나에게 전화할 사람이 없다는 것. 주변이 적막해진다. 이따금 딸이 전화했을 뿐이다. 현직에 있을 때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휴대폰 벨소리 등 시끌벅적하던 세상이 돌연 적막해졌다. 퇴직자는 이런 적막함이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려진 심판 같다. 누구도 네게 뭘 원하지 않아.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므로 너는 필요 없는 존재야.
적막함은 술과 관련이 있다. 오후에 와인을 마시는 것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저녁에 와인을 마시는 경우도 잦아진다. 점심때 슈퍼마켓 맞은편의 간이 매점을 찾는다. 커리부르스트에 맥주를 대게 두 잔까지 곁들인다. 하루 빨리 이런 무의미한 음주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냥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만 마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어느 날 아내가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간다. 당분간 친구네 집에서 있을 거야. 이 시간이 오기까지 아내의 호소도 들었지만, 변화한 것은 없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 남자에게 아내가 없다. 돈도 없다. 친구가 죽었다는 부고를 접한다.
인간이 자기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수 없다. 고작해야 병, 쇠락, 아픔을 생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떤 사람은 쉽게 다른 이는 어렵게 또 누군가는 치를 떨며 아무튼 죽음 자체를 우리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인간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불사의 생명을 가졌다고 여긴다. 자신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나 인생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린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머니 배 속에 잉태된 그 순간부터 늙어간다. 얼마 전에 읽은 글은 우리 인생의 첫 순간부터 많은 세포가 생명력을 잃는다고 묘사했다. 20대 중반부터는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30대 중반부터는 기억력이 삼퇴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다만 첫 순간부터 죽음만이 자라날 뿐이다. 늙음은 가능성의 상실이다. 그리고 죽음은 가능성의 삭제다.
은퇴는 심판이다. 이는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앞당겨진 증명이었다. 직장 생활의 끝이 다가왔다는 암시였다. 일을 하는 사람은 이 끝을 아직 멀리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이 끝을 기다릴 뿐이다. 그 끝으로부터 자신이 무방비라는 생각이 깊은 절망은 불렀다. 은퇴하고 맞이한 시간에 느꼈던 공포가 죽음을 보는 두려움이었음을 깨달았다.
“잘못된 인생에 올바른 삶은 있을 수 없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깨어지지 않는 진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그는 이 문장이 인간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의 인생에서 잘못된 것과, 올바른 것이 깔끔하게 구분되기는 할까? 잘못고 올바름을 깔끔하게 구분할 수만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인생은 잘못과 올바름이 복잡하게 뒤엉킨 것이었을 따름이다. 항상 인생은 잘못과 올바름의 뒤죽박죽이었다. 둘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해줄 수 있는 심판관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는 것 역시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어려서 달리기, 수영,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 읽고 쓰는 법과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도 배웠다. 나이를 먹는 것을 배우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늙으면 어렸을 때보다 배우기가 어려워서? 그럼 나는 나이를 먹는 것을 배우기에 너무 늙었나?
친구의 죽음을 통해 해커는 술에서 벗어난다. 퇴직의 혼란에서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도 짧다.
은퇴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은퇴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감각이 무디어진 모양이다. 이 책은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읽어보면 참고할 내용이 많다고 느꼈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아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노년: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홍상희, 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년. 7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