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농사일지. 04
디자인과 인문학
몇 년 전, 친구와 내가 곧 잘 따르던 교수님의 갑작스런 이직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교수님의 꿈을찾아 이직을 결정하셨다고 한다. 친구와 함께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교수님을 잠깐 찾아뵈었고, 교수님은 떠나기 전 우리에게 꼭 들어야 하는 수업을 알려주신다며 '디자인과 인문학'이라는 과목을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추천을 받았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렁뚱땅 수강하게 된 '디자인과 인문학'. '책을 읽고 디자인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초청 강연들로 이루어진 수업이었다. 평소 만나보고 싶었던 분, 이 자리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분들의 강연들을 들으며 즐거웠지만, 디자인과 인문학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지 못했다.
'디자인과 인문학' 수업을 들었던 학기에는, '북디자인' 수업을 함께 수강하고 있었다. 이 수업의 최종 과제물은 문학과 사진이 함께하는 책 한 권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떤 문학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던 중, 마침 '디자인과 인문학' 수업에서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의 시 낭독 강연을 듣게 되었다. 여덟 편 정도의 시를 낭독해주시고 감상을 나누었는데, 그중 신용목 시인의 '소사 가는 길, 잠시'라는 시가 내 마음에 성큼 다가왔다.
소사 가는 길, 잠시 / 신용목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시의 전문을 올린 것이 문제가 된다면 말씀해주세요.)
우리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삶의 순간과 겹치게 되고, 그렇게 겹쳐진 순간순간들이 삶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문득 느껴졌다. 잔잔하고 건조한 시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이 시처럼 겹치는 순간에 대해 덤덤히 이야기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보통 책을 제작하려면 최소한 36페이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소사 가는 길, 잠시'와 비슷한 주제와 분위기를 가진 시를 찾기 위해 학교 도서관의 시집들을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찾게 된 시는 황인숙 시인의 '골목길', 과 이솔아 작가의 '나는'이었다.
글을 모두 찾았으니 사진을 준비할 차례! 주제를 '겹쳐지는 삶의 순간들'로 정했기 때문에, 그와 어울리는 사진을 직접 필름 카메라의 다중노출 기능을 활용해 찍어보았다. (다중노출 기능을 사용하면 겹겹이 쌓이고, 포개어지는 느낌을 낼 수 있다.) 필름 사진은 현상하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기에 꽤나 마음 졸이며 작업을 했다.
그 다음은 사용할 사진을 추려내고, 배치하기. 보통은 인디자인을 사용해 편집하지만 여러 개의 대지를 한눈에 보고 싶었고, 텍스트 작업이 많았던 편이 아니라 일러스트로 작업을 했다.
건조하면서도 따사로운, 그리고 왠지 시간과 공간이 멈춘듯한 시들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이미지를 큼직큼직하게 배치하고, 여백을 활용하여 완급조정을 했다. 그리고 다양한 판형을 사용하여 서로 다른 인생들이 겹쳐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재미를 더하기로 결정.
그리고 만들어진 최종본. 색지를 사용해서 밀도를 올렸다. 붉은색을 잘 잡아내는 아그파 필름으로 촬영을 했기 때문에 붉은 색지를 사용했다. (현재 아그파 필름은 단종되었다...) 제본은 따로 맡기지 않았고, 판형의 2배로 프린팅 한 뒤 직접 실제본 했다.
작업을 마치며 생각해보니, 디자인과 인문학의 연관성은' 작가의 생각이 담겨 세상에 나온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작품은 생각을 만들고, 만들어진 생각은 또 다른 작품을 만든다는 점 역시도. 내가 알게 된 것이 정답일 수도, 정답이 아닐 수도, 애초부터 정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문제이지만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끝나는 지점 없이 둥글게 연결되어있는, 굴레와도 같은 디자인과 인문학의 연속성. 교수님께서 왜 디자인과 인문학에 대한 강의를 추천해주고 떠나셨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