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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카제 Sep 04. 2024

깨어짐, 그 시작에 대해

깨어지는 것은 대개 부정적이다.


기존의 형태가 물리적 충격에 의해 변형되어 그 쓰임을 다하지 못하게 됐을 때 우리는 깨어졌다고 표현한다.

순수하고 완결된 형태일수록 깨어진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는 고막을 울리는 소리와 산산이 조각난 파편들을 떠올리며 공감각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너무나도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대범하다.


우리는 관계에도 이 표현을 사용한다.

관계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그 틈을 넓히며 마지막을 향해 가는 그 잔인한 여정의 끝에 이 단어가 있다.


흔히 깨어짐은 결말을 말한다. 하지만 깨어짐과 부서짐을 변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리적 형태가 깨어지지 않고는 변형은 있을 수 없다. 부서지는 순간의 처절함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친다. 소란스러운 그 공감각에 홀려서 진짜 본질을 보지 못한다.


인생에서 우린 수없는 깨어짐을 경험한다. 거품 묻은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산산조각 나는  접시처럼 의도하지 않은 깨어짐들...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날카로운 조각에 상처가 나기도 한다.


그럼 이런 깨어짐은 나를 찾아온 지독한 악연이거나 내가 만들어낸 인생의 처참한 실수일까.


꽃에게 깨어짐은 속절없이 지는 꽃잎일 것이고, 나무에게 깨어짐은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른 잎사귀채 떨어져 바닥으로 나뒹구는 낙엽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깨어짐 중 어느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없다. 이는 다음 해 새롭게 피어날 꽃과 봄에 다시 연둣빛으로 만나게 될 새잎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일 아닐까.


우리의 깨어짐은 그 자체로는 결말이 맞다. 하지만 인생의 관점에서는 다르다.

지난해 국이 이른 봄까지 마른 꽃 그대로 그 자태를 유지한 채 색만 바래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겨울철 삭막한 정원에는 그 자체로도 멋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새 봄에 새 꽃을 기대한다면 지난해 바래져 버린 꽃은 더 지나기 전에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연분홍, 혹은 보랏빛 탐스런 수국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깨어짐이 마지막이라 여겨진다면, 바랜 수국을 기억해 보자. 한 계절은 그런대로 둬도 괜찮다. 하지만 인생의 봄을 기다린다면 마른 꽃은 두지 말고 잘라줘야 한다.


우리들이 겪는 인생의 깨어짐은 꽃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고, 익은 열매가 툭 바닥으로 떨어지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그다음 개화, 푸른 잎, 또 다른 열매로 이어지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끝이 시작이 되고, 깨어짐이 변화의 출발이 되는 자연의 법칙, 이는 우리가 그 소란한 일을 자연스럽게 넘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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