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카제 Aug 22. 2022

[영화 리뷰] 굿럭투유, 리오그랜드

엠마톰슨, 그녀의 용기에 답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엠마톰슨


이 사진이 한동안 나의 카톡 프로필이었다.

 당시 사진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받았었다. 누구냐부터 시작해서 왜 할머니 사진을 올려놨냐는 타박까지 지인들의 다양한 반응에도 난 한동안 이 사진을 바꾸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나의 나이듦'에 대해 한참 고민하던 시간이었다. 지금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 모든 게 안정되는 노년기가 빨리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 지혜를 은 세련된 할머니가 되고픈 바람, 그 나이가 왔을 땐 이런 주름과 미소를 지녔으면 하는 소망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년 여배우들이 있다. 근데 아쉽게도 다들 외국 배우들이다. 엠마톰슨, 다이안키튼, 제인폰다, 쥴리안무어. 모두 60~70대의 나이임에도 그녀들만의 매력을 지니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인다. 헛된 젊음을 쫒지 않고(다이어트는 건강을 위해 필수이니 예외로 치자) 지금의 자신을 인정하며 주름진 얼굴로 로맨스도 찍고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는 그녀들은 나의 노년기 롤모델이다.


아하! 깜박했다. 우리나라에는 윤여정 배우가 있구나. 그녀의 쿨함과 세련된 패션센스 못지않게 삶의 지혜와 나이를 초월한 멋짐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나의 나이듦에 긍정적 기대를 심어준 엠마톰슨의 영화가 최근에 개봉했다.

바로 '굿럭투유, 리오그랜드'.

시놉을 읽고 다시 한번 놀랐다. 와우! 역시 그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60대 은퇴한 종교 담당교사 낸시.

그녀는 남편과 2년 전 사별했으며, 때론 걱정을 끼치고, 때론 마음 든든한 두 자식을 두고 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뜻밖의 결정을 한다. 자신을 위한 퍼스널 서비스를 예약한 것이다. 평생 섹스 상대라고는 남편 한 사람이 다인 그녀, 사별 후 치근대는 상대는 있었으나 데이트 한번 안 해본 그녀가 파격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개봉관이 많지 않아 평일 퇴근 후에 볼 수 있는 영화관은 CGV 여의도와 광화문 씨네큐브 두 군데가 유일했다. 난 후배와 함께 광화문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 스포가 어마어마하게 포함된 리뷰입니다.



이런 리얼 코미디가 어딨을까. 60대 엠마 톰슨이 아니라, 내가 또는 나의 후배가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읊조릴 만한 대사가 스크린에 그대로 펼쳐졌다. 요우리나라 20~30대조차 공감하지 못할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성의식을 지닌 낸시의 모습은 서양문화권에 60대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나와 내 주변 40~50대 한국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한참 웃었다. 하지만 이내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편견, 사회적 억압은 지역이나 문화, 세대를 너머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생 남편 한 사람과의 섹스가 전부이며, 어떠한 변화나 새로운 시도 없이 자신의 욕망도 모른 채 늙어버린 여성, 종교 교사로 재직하며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에게 남자를 유혹한다며 막말을 내뱉던 보수적인 여교사가 바로 낸시였다.


그런 그녀가 일생일대의 일탈을 감행한다. 자신이 예약하고 비용을 지불했음에도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젊은 남성을 보며 어쩔 줄 몰라 미안하다며 그대로 가도 좋다는 말부터 하는 그녀. 엄청난 일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죄의식과 욕망 사이 이도 저도 못하고 어리석은 말만 뱉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어떤 코미디 영화보다  웃음을 선사했다.

젊은 청년 리오는 극도로 불안해하는 60살이 넘은 낸시를 능숙하게 다루며 안심시키는 성숙한 어른이었다. 경험치의 차이와 그 속에서 나오는 성숙도는 나이와 상관없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연애와 섹스도 경험치의 파워는 엄청나니까.



"낸시? 낸시~"


리오가 가장 많이 한 대사인 듯하다.

그는 다양한 성조로 낸시를 부르며 그녀를 진정시키기도, 달래기도, 나무라기도 한다. 그가 그녀를 다루는 방식은 모든 남자들과 남편들에게 보급하고픈 성숙함이다.

친절하고, 기다릴 줄 알고, 존중하며 신뢰를 준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한다. 하지만 리오가 낸시에게 성과 욕망에 눈뜨게 해주는 마초이거나 환상 속 왕자님은 아니다(몸매와 외모는 왕자님이지만 말이다).


오히려 리오는 姓을 초월한 존재, 최소한 姓에 있어서는 해방된 인물 같기도 하다. 편견 없이 어떤 성적 욕망도 폭력이나 범죄가 아닌 한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고객을 인종, 나이, 남녀의 구별 없이 수용하고 함께 즐긴다. 이 표현은 문란함으로 바뀌며 리오를 천박한 매춘남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를 오히려 섹스계의 성인(Saint)로 보이게 할 지경이다.



두 번째 만남은 좀 더 현실적이다.


비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낸시는 성적 환상을 담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누군가에게는 시시할 수 있는 목록이지만 이마저도 진지하게 꺼내놓는 낸시의 모습에 실소가 터진다. 우린 가끔 여행을 위한 지나친 계획이 오히려 즐거움을 망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완수할 과제가 아님에도 목록과 순서에 집착하는 낸시를 통해 때론 비슷한 어리석음에 사로잡히는 나를 본다.


이런 낸시가 급기야 큰 실수를 저지른다. 이 영화의 갈등의 시작은 낸시의 오지랖이다. 첫 만남부터 사적인 질문을 쏟아내던 낸시. 급기야 침대에서 리오의 가족과 엄마에 대해 묻고, 흡사 비행 청소년을 상담하는 선생님 같은 질문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질문은 리오에게 매우 부적절하고 무례하다. 친밀함을 떠나 이 둘의 관계는 철저히 비즈니스 관계이기에 라오의 충고처럼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구매한 만큼 최대한 현재만 생각하고 서로에게 집중하며 즐겨야 했다.

하지만 낸시는 리오가 만든 환상을 깨고 현실을 집요하게 건져 올린다.


리오는 고객과 현실을 나누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눈치 없는 그녀는 두 번째 만남만에 성큼 한 발짝 더 다가간다.

집요한 낸시의 설득에 자신의 직업관, 어떤 고객을 만나는지, 그들을 통해 무엇을 느끼는지를 공유하는 리오. 게다가 엄마와 오래전 관계가 끊겼고, 가족들에게 자신의 일을 숨기고, 시추선을 탄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청년이 자신의 일에 나름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졌다는 사실을 듣고 흥분한 낸시는 선을 넘기 시작한다. 리오의 엄마에게 아들이 많은 여성을 성적으로 해방시키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당당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리라고 부추긴다. 또한 상담 이력을 살려 자신이 어머니를 만나보면 어떻겠냐는 터무니없는 제안까지 한다. 나아가 자신이 구글링을 통해 리오의 실명을 알아냈다고도 털어놓는다. 현실을 공유하고픈 욕심에 그리 했다는 낸시에게 리오는 폭발하고 둘의 관계는 호텔방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끝난 것처럼 보인다.


섹스의 성인처럼 보이고, 남이 뭐라 하든 자신의 직업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은 리오도 당연히 상처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 그에게 낸시가 나누고자 한 얘기들은 불편했을 것이고, 지나치게 일방적이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않는 성노동자이며, 청소년기 보수적 가족에게 자신의 성적 일탈로 외면당한 리오는 오히려 누구보다 상처가 깊다.

자신의 외면당하고 거절당한 상처가 상대를 깊이 허용할 수 있는 미덕이 되는 것도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리오가 애쓰며 만드는 고객과의 판타지는 가짜 이름 리오가 구축한 세계이다. 리오는 최대한 그 양쪽 세계가 서로 만나지 않게 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낸시는 계속 그 두 세계의 경계를 넘으려 했고, 리오가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많은 이들이 상대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들춘 낸시의 오지랖을 무례하다고 말한다.


나도 불편했지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낸시는 모르는 남자와 물리적 성행위만을 나누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관계의 서사와 상대에 대한 이해, 그를 통한 친밀감이 꼭 필요했을 테니까.

나랑 자는 남자가 어떤 남자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자신을 파고드는 죄의식을 상담과 교화를 통해 어른의 역할을 했다는 안도감으로 상쇄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행하는 선의와 선행의 출발점에 간혹 나도 모르는 이기심과 자기만족이 숨어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난 상대를 위한다고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을 경우, 그건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다행히 낸시의 저돌적인 사생활 공격은 리오의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들며, 주변 관계들과의 긍정적 변화를 가져온다.


이제 마지막 만남이다.

처음으로 호텔방이 아닌 사회적 공간에서 만난 두 사람. 이 날 낸시는 달라진 헤어스타일 때문인지 예전보다 차분하고 한층 성숙한 중년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호텔 커피숍에서 마주 앉은 둘 사이에 제삼자가 나타난다. 바로 낸시의 제자. 그녀는 커피숍의 웨이트리스이다. 그녀를 통해 낸시는 지난날 차별적 시각과 지나친 편견으로 여학생들에게 상처를 줬던 자신을 발견한다. 제자 떠올리지 못하는 낸시와 달리 그 학생은 교사 낸시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리오 앞에서 신나게 그녀의 과거를 고자질하던 제자 덕분에 낸시는 과거 자신의 오만과 대면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삶이라고 확실히 선을 긋고 상대를 비난하거나 무시했는데, 어느 순간 내 삶이 그 선 건너편에 있을 때 우리는 깊은 당혹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내 과거의 오만에 사과하며 내일의 삶에 겸손해진다.

인생에서 '절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낸시는 그 순간 제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리오와의 관계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이 부분은 눈빛으로 리오에게 동의를 구했다지만 굳이 아웃팅처럼 리오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었나 싶다)


이제야 생에게 자기 직업을 솔직히 얘기한 리오. 리오를 통해 조금 더 당당해지고 자유로워진 낸시. 이들이 즐기는 마지막 잠자리가 화면에 유쾌하게 펼쳐진다. 초반 스킨십과 베드신 노출을 극도로 자제한 감독은 마지막에서야 편하게 스크린에 그들의 잠자리를 보여준다.



평생 노출 연기를 한 적 없는 여배우가 62살에 옷을 벗었다. 그녀는 젊은 남자 배우와의 베드신과 전신 거울 앞 전라신까지 소화했다. 모르는 이들은  흥미로운 가십으로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장면에는 여배우의 결연한 의지와 굳건한 신념, 단단한 용기가 담겨있다. 평생을 남의 시선과 편협한 도덕관에 묶여있던 늙은 여성이 자기 구속에서 벗어나 부끄럼 없이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건강한 성적 욕망인정하과정에 이 장면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60대 여성인 엠마 톰슨도 노출신이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씨네플레이 인터뷰 참조)


역할을 제안받았을 땐 좋았지만 노출 연기가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었어요.
대부분의 여성과 마찬가지로
저는 제 몸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몸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매일 새롭게 주입되잖아요.
거짓된 사회적 미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는 노력은
결국 시간, 에너지, 돈, 열정, 호기심 등
모든 것을 낭비하는 건데 말이죠.

이 낭비를 이젠 우리 모두 멈췄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몸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60대 여성의 몸이었다. 늘어진 뱃살과 축 처진 가슴, 적나라한 현실적 여성의 몸을 스크린에서 보는 생경함이란... 남성의 시선이 배제되고 성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여성의 몸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 감독과 배우의 의도는 적중했다. 낸시가 찬찬히 거울에 비친 그녀를 바라볼 때 관객도 어떤 의식을 치르듯 조용히 그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실제로 이를 촬영했던 엠마 톰슨도 당시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과제, 오르가슴.

여성에게 이 단어는 존재하지만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미지의 섬 같다. 매번 침대 위에서 연기를 통해 남편에게 보여주었지만 정작 그녀는 느껴본 적 없는 오르가슴을 리오와의 관계에서 가장 큰 과제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 번의 섹스에도 낸시는 그 섬에 닿지 못한다.


엠마 톰슨은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씨네플레이 인터뷰 참조)


여성의 성적 만족은 그 누구의 우선순위도 아니에요.
심지어 당사자인 여성에게도요.


그렇다. 여성의 성적 만족과 욕구는 그 누구의 우선순위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욕구의 추구와 솔직함은 헤픈 여자로 치환되며 상대도 자신도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여성 스스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만족을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자신이 이런 서비스를 받기에 자격이 없는 거 같다는 낸시에게 자신이 원하는데, 왜 주저하냐는 리오의 물음은 모든 여성들에게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다.

요즘 20~30대 여성들은 공감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난 세대보다 적어도 한걸음은 나아갔다는 얘기일 테니까.


마지막 그 섬에는 리오와 함께가 아닌 낸시 혼자 다다른다. 그건 다분히 여성 감독의 의도된 연출로 보인다.

그리고 혼자 남은 호텔방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찬찬히 쳐다보는 낸시의 묘한 표정도 인상적이었다. 그 표정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을 떠올리게 했다. 미정이가 자기만의 해방에 다다랐듯 낸시도 성적 자기 해방에 다가간 것 아닐까?


이 영화의 결말이 '같이'가 아닌 '혼자' 마무리된 것을 두고, 다소 페미니즘적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얼마 전에 모 프로그램에서 "나와 잘 지내야 남과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오은영 박사의 조언은 지금 이 상황에도 대입 가능하지 않을까?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 자신의 욕망에 귀 기울이고 나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질 때 상대와도 만족스러운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낸시는 드디어 용기 내어 자신을 긍정하고, 본인의 욕망과 몸에 대해 알아가는 단계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리오는 그 과정에 훌륭한 조력자였지만, 그 완성은 낸시 혼자의 몫인 것이다.


보수적 사회에서 50년 가까이 낸시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나와 같은 중년 여성에게는 거울 앞에 서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성의 해방에 꼭 리오가 필요한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


마지막으로 62세 엠마 톰슨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그 용기에 답하여 나도 내 삶에서 작은 용기를 내봐야겠다(이 리뷰를 적는 것에도 작은 용기는 필요했다).


낸시와 리오가 주고받은 마지막 대사가 이 영화의 제목이 됐듯이, 이 땅의 모든 낸시들에게 "Good luck to you!"라는 마지막 응원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주택살이 11] 자연은 잔인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