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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카제 Nov 04. 2022

고마워! 어김없이 찾아와줘서..

여름과 가을을 채우는 꽃, 백일홍

우리 마당을 대표하는 나무는 두나무와 칠자화, 배롱나무, 이렇게 세 그루이다.


맨 먼저 소개할 나무는 집 앞을 든든하게 지켜주며, 매해 봄에는 청초한  흰꽃을, 초여름에는 새콤한 열매를 내어놓는 자두나무다.


이 나무는 나에게 과실수라기보다 꽃나무에 가깝다. 약을 치지 않으면 관리가 힘든 열매보다 잔잔한 꽃으로 봄을 알리는 매력적인 꽃나무. 열매를 내어낸 후로는 별볼일 없고, 초가을부터 떨구는 낙엽 때문에 가으내 집앞을 어지럽히는 이 나무를 엄마는 베어내자고 성화지만, 긴 시간 집을 지킨 나무와 헤어지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솔직히 깊은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헤어진다 생각하면 잔잔한 봄꽃이 자꾸 생각나기도 하고, 별 쓸모없다 여겨지면 바로 쳐내지는 인간사의 처량함이 이입되어 쉽지 않다. 그래도 눈치 없이 쑥쑥 자란 덩치 큰 가지들은 올해 좀 자르긴 해야겠다.


두번째 나무는 작년에 처음 만났다. 죽어가는 주목나무를 캐고 아빠가 직접 심어준 칠자화이다. 나무가 심겨진 자리가 거실 측면창 바로 앞이라 나무의 모양과 색은 창밖 풍광을 좌우했다. 그 전 주목나무 가지 사이로도 숲이 보였지만 주목나무 특유의 짙은 녹색과 드문드문 말라버린 갈색 잎이 뒤섞여 측면 창은 언제나 좀 어두웠다. 우리집 앞 산이 연초록으로 반짝이는 봄철에도 말이다.


하지만 작년 칠자화가 심겨지고 풍광은 180도 달라졌다. 싱그러운 밝은 녹색의 잎들은 숲과 어우려져 이질적 원근감은 사라지고 하나의 확장된 푸른 숲이 되어 쉴새없이 반짝였다. 그래서 주말 아침 어김없이 측면창 블라인드를 올리고 칠자화와 그 사이 보이는 숲을 마주한다.


그리고 칠자화는 신기하게도 두번의 꽃을 내어놓는다. 엄밀히 말하면 한번의 꽃과 이 진 자리에 남은 붉은 꽃받침이다. 그것이 마치 꽂처럼 보여 두번 꽃을 피운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흰꽃과 붉은 꽃받침은 꽃이 드문 늦여름과 가을에 원을 채우기에 더 귀하다. 혹자는 칠자화 꽃이 향이 짙다는데, 우리 가족은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온갖 벌들이 나무 주변에 열심히 모여드는 것을 보며 나름 향이 짙은가보다 짐작할 뿐이다.


마지막 나무는 내가 가장 아끼는 배롱나무이다.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나무는 주택단지의 가장 인기 수종이다. 초여름부터 집집마다 붉은 백일홍이 꽃을 피우며 골목에 여름을 알린다.


백일홍은 초화와 나무 두 개가 있다. 처음에  목백일홍과 초화 백일홍이 헷갈려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오히려 백일홍이 나무라고 생각하지 못해 우리집 나무를 한동안 배롱나무로만 부르곤 했다.


백일초라고도 불리는 한해살이 식물인 백일홍은  초여름부터 담장, 길가, 장독대 등에서 흔히 만날 수 있으며, 우리 주택단지 들어서는 길가에도 여름마다 빼곡히 심겨져 색색의 꽃을 자랑한다. 다년생이 아니어서 누군가가 정성스레 매 가을 씨를 받아 다음해 봄에 심는 것이리라. 그 꽃들을 보며 이름모를 손길에 감사함이 미친다.  

비슷한 시기 붉은 꽃을 백일이나 내어놓는게 기특해 동일하게 붙여진 이름일. 하지만 이 피는 시기 말고는 외형적으로 비슷한 것은 없다.


우리집은 정남향이지만 산 바로 밑에 위치해 다른 집들보다 기온이 좀 낮다.

신기하다. 그게 뭐라고 몇 발자욱 더 떼는 것 뿐인데 골목의 온도까지 달라질 일인가. 그래도 자연은 그렇더라. 골목 접어들어 산과 가까워지는 그 작은 환경의 차이가 온도를 만들고, 습도를 만들더라. 그래서 우리 골목 꽃들은 다른 집보다 좀 늦게 핀다.

몇 해전 여러가지로 힘들었던 해, 백일홍이 시름시름 앓으며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했다. 그때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여주인공처럼 애를 태웠던 기억이 있다.


그 다음해는 가지를 쳐 꽃을 보지 못했고 그 이듬해부터 다시 무더운 여름날 붉게 타는 백일홍을 볼 수 있었다. 흥에 취한 시골 장터 아낙네 바지에서나 볼 법한 꽃분홍색이 정겹다.


그런데 올해도 병이 들었는지 시름시름 앓는 모습에 마음을 졸였더랬다. 어느새 나무의 부침은 나의 힘든 상황이 이입되며 안타까움 그 이상이 되었다. 다른집 백일홍들이 꽃을 한창 피우던 여름날에도 껍질 없이 반지르르한 우리

백일홍 가지에는 꽃이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가을이 오자 우려는 실망으로 바뀌어 변심한 연인처럼 원망까지 들었다. 그 꽃분홍의 경쾌함을 만나지 못하다니... 그렇게 포기한 어느 가을날, 우연히 올려다본 가지에 팝콘같이 터진 분홍색 꽃을 만날 수 있었다. 안도의 숨.


 그게 뭐라고 마음을 의지했나보다. 분홍 망울이 힘겹게 힘겹게 꽃을 피운 것이 내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자기 자리에서 피울 수 있는 만큼 내어놓는 모습에 생명력의 끈기도 느꼈다.


죽기 전에는 뭐든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기 안에 남은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몇몇 가지에 분홍색의 꽃을 피워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로써 나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꽃분홍색만큼이나 경쾌한 일들이 생겨나길, 그리고 백일홍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의 꽃을 틔우길...


난 오늘도 정원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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