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 대신 경험이 남긴 것들
20대 초반의 나는 MBTI 외향형 100%, 호기심 대마왕이었다. 연세대를 다니며 학과 학생회장부터 다도, 국악, 타로 상담, 밴드부, 한국무용, 연극, 댄스, 환경봉사, 학술, 야구동아리 매니저까지 별의별 활동을 섭렵했다.
얼마나 캠퍼스를 들쑤시고 다녔는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었고 이름 석 자를 대면 “걔 거기에도 있어?”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내가 새로운 동아리를 시작한다고 하면 처음엔 놀라워하다가 나중엔 “쟤 또 일 벌이나 보다”하며 그러려니 했다.
명문대 동기들이 대기업 인턴을 하며 스펙을 쌓을 때 난 홀로 동아리를 전전하며 춤추고 노래했다. 당시에는 커리어와 전혀 관련 없어 보였던 이 “쓸데없는” 경험들은 나중에 미국에서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꿨다.
2021년, 케이팝 문외한이자 몸치였던 나는, 댄스부 친구가 멋져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로 무작정 댄스동아리에 가입했다. 몸치도 그냥 몸치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장기자랑을 나가면 춤을 못 춰서 친구들이 큭큭 댔다. 열심히 추는데 대놓고 웃기가 미안했다고 했다. 팔다리가 기다란데 몸이 뻣뻣해서 종이인형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스무 살의 패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엄마는 내가 댄스동아리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딸이 너무 열심히 살다가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3개월 동안 혹독한 댄스 훈련(?)을 거쳤고, 면접은 줌으로 이뤄졌다. 다행히 당시에 팬데믹 시기라 경쟁률이 낮았다. 그렇게 난 팔자에도 없던 “케이팝 댄스부”라는 타이틀을 걸었다.
그 후 6개월 동안 매일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춤을 연습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간절한 적은 없었다. ‘공부가 더 쉬웠다’는 말은 적어도 춤에 있어서는 사실이었다. 몸이 남들보다 유난히 뻣뻣해서 기초체력과 유연성을 길러야만 했다.
그래도 공부는 곧잘 해서 과외해서 번 돈이 꽤 있었다. 바로 연신내에서 요가 수업을 들었다. 주 4회, 신촌에서 오갔다.
연습은 마무리되어 가는데 뮤직비디오 촬영이 고비였다. 팬데믹이라 연습하기도 까다로웠다. 신입 부원이 처음부터 8인 대형 팀을 짜는 바람에 많은 인원을 컨트롤하는 게 어려웠다.
우여곡절로 팀원을 모아 다음 해 1월, 이대 쪽에 스튜디오를 빌려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샵에 가서 메이크업도 받고 옷도 새로 맞췄다. 감사하게도 우리 댄스 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몇 천 회를 기록하며 결실을 맺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나 싶었을 거다. 시간 낭비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시간에 명문대 인맥 살려서 경영학회나 인턴을 하면 취업이 더 쉬워질 텐데, 상경계 전공도 아닌 인문학 전공생이 허튼짓을 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반전은 몇 년 뒤 찾아왔다. 미국에서 케이팝 기자가 된 거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케이팝에 문외한이었는데, 대학 댄스부에서 배운 배경 지식과 댄서 커뮤니티가 예상치 못한 자산이 되었다. 직접 춤을 추지 않지만 팬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댄스 인플루언서를 만날 때도 부담감이 덜해져 기자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타로 상담 동아리에서 갈고닦은 말솜씨는 미국에서 취업 협상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밴드부와 국악 동아리는 미국 음악 산업에 진출할 발판을 만들어줬다.
연극 동아리에서 익힌 무대 연출과 조명, 음악 기술은 케이팝 현장 이벤트 운영에 큰 도움이 됐다.
공연을 여러 차례 올리고 MC를 맡으며 단련된 멘탈 덕에, 해외 생활의 험난함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얻었다.
다도 동아리에서 배운 차 문화는 여전히 미국에서 좋은 아이스브레이킹 주제가 된다.
사회과학 학술 동아리에서 갈고닦은 글 실력은 기자생활과 콘텐츠 제작에도 여전히 톡톡히 도움이 되고 있다.
만약 내가 그때 댄스동아리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도전이 두려워 안전지대에만 머물려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렇게 전쟁 같은 해외에서 잡초처럼 살아남지는 못했을 거다.
나는 믿는다.
이 세상에 “쓸데없는” 경험은 절대 없다고.
이 많은 경험들로 현재의 내가 존재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