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원리'가 우선한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본능적으로 이 '원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발견 해 왔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種이 현재 지구 생태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요인이다.
무지라는 무한 시공간에 갖힌 인간의 탈출구가 바로 '원리'의 터득이며 나는 이를 '원리우선주의' 라고 명칭한다.
우주와 자연이라는 인간 생태계의 원리를 찿아 들어가고자 하는 노력이 '과학'이다. 천체우주물리학에서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적 자산이 축적되고 그 결과 현대문명이 성업 중이다.
나는 서두에서 '원리'를 쫓는 인간의 부단한 선택적 진화가 본능에 기반한 필연적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원리에 뒤쳐지는 생명체나 기타 다른 인간종은 이미 이 존계계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원리주의'의 흐름을 이탈하는 미래의 그 어떤 실수는 존재계라는 연극무대에서 하차되고 말 것이다. 이 퇴출의 공포를 가장 절실하게 인지하는 쪽은 '현대물리학계' 이다. 지금 당면한 한계는 이것이다.
1. 1개를 알게되면 그와 관련되어 모르는 것이 3개 이상 더 생겨난다.
2. 물리학이라는 도구로 파악 가능한 한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그 한계를 넘어 저쪽 편의 차원으로 건너 갈 도구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껏 AI 세계나 양자컴퓨터 정도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건 장난감 수준이다.
3. 인간이 그랬던 것 처럼 지속적인 진화적 노력은 계속 되겠으나 불행히도 지구와 태양과 은하단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처럼 이 모든 수백억 광년의 시도들에는 의미가 없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한 모퉁이에 낑겨 살고 있던 나는 이 모든 '무의미'의 탈출구를 찿았다.
"名이라는 일법(一法)이 모든 것을 종속 시킨다"
名이라는 것은 '名色'에서 보듯이 한자로 번역된 '정신적 측면'을 상징하는 단어다. (色은 물질적 측면을 대표한다)
名의 내용은, 촉수상사(觸受想思)를 '四無色陰'이라고 하는데 陰이라는 용어가 의도하듯 보이지 않지만 있는 그 어떤 것이다. 하여튼 名의 시작은 觸(현재의 시작점)이라고도 혹은 受 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다.
"觸을 원인으로 한 快와 不快, 觸이 없다면 존재(有) 라는 것도 없다. ‘비존재(無有)와 존재(有)’ 라는 바로 그러한 것도 여기로부터 인연하는 것이다."
"世間에서 ‘快와 不快’라는 것, 그것에 의하여 欲이 일어나고, 色들에서 존재(有)와 비존재(無有)를 보고, 世間에서 독단을 일으킨다."
'名이라는 일법(一法)'의 시작이 인간의 느낌(受)이고 觸(현재의 시작점)도 受라는 '快와 不快'이다. 세상의 시작은 '느낌'이 첫 단추이고, 이러한 名이 시작되는 토대가 身(色)이다. 따라서 快와 不快 그리고 그들이 물처럼 솟아나는 身을 나는 '원리우선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이후 '원리우선주의'의 수 많은 이론들이 전개 되겠지만 한정된 여백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한가지 예를 들고 마친다.
당신이 세계를 손아귀에 쥐고 싶은가? ..........
......................... 가능하다.
한가지 원리가 우선 한다면.
너의 身에서 일어나고 있는 '快와 不快'를 완벽히 영원히 정복하라. 그러면 너는 不死의 능력을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