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이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 하셨다. '주인이 긴 출장을 떠나며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자신이 돌아 올 때 까지 잘 관리하라 고 위임을 했다. 마침내 출장 복귀 후 종들로 부터 보고를 받는데, 어떤 종은 돈을 두배로 어떤 종은 열배로 불렸음을 보고하니 주인이 잘 했다고 칭찬하고 포상을 주었다. 그런데 한 종은 혹시나 실수 할까봐 두려워서 돈을 깊숙히 보관만 했다가 그대로 돌려주자 주인은 대노하며 그 종에게 벌을 내렸다' 는 이야기를 한다.
이 비유가 인간이 세상을 사는 방법을 넌지시 예감케 하는 좋은 사례이다.
인간이 '생노병사'의 고통을 겪으며 한평생을 산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기억을 삭제 시킨채 이 세상에 던져 놓았다가, 왜 이런 세상을 경험케 하고 나서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삶을 마감케 하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이것이 '주인이 종에게 돈을 위임했다'는 의미이고, 그리고 죽음은 그 돈에 대한 정산보고 이고 이후 그 결과에 따라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
이 예수의 비유를 나름데로 어떻게 해석해서 자신의 삶을 살던지 그건 자신이 생각 해 볼 문제인데, 나는 이 비유를 통해 붓다가 제시한 공부의 길을 찿는데 적용했다.
붓다는 생노병사라는 경험의 세계를 헤메는 인생들에게 하나의 길을 알려준다. '땅에 넘어 진 자는, 그 땅을 짚고 일어나라' 고.
우리가 만난 그 苦를 마주하고 바로 알고 바로 보아야 만 이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의 出口를 찿게 된다는 것.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모조리 유위(有爲)이다.
有爲란 다른 말로 풀면, 조작된 것, 조합된 것, 지어진 것, 원인과 조건에 기반하여 형성된 것, 본래부터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有爲를 본래적인 절대적인 그 어떤 것, 영원한 것, 고상하고 유지하고 싶은 것 등으로 품는 순간 이 세상은 苦로 돌변한다.
그래서 붓다는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한번 뿌리 뽑아보자 라는 것이다. 有爲를 또 다른 有爲로 해결 해 보자는 것. 그것이 12연기 구조로 파악된 '苦蘊의 集'을 (동일한) 有爲적 방식으로 '苦蘊의 滅'을 불러오는 방도다.
12연기의 유전문→고의 집(集)=苦集聖諦.
12연기의 환멸문→고의 멸(滅)=苦滅聖諦.
탐진치(=不善의 뿌리)는 ‘올바르지 않은 작의’와 관련됨.
사견(=不善)은 ‘올바르지 않은 작의’와 관련됨.
무명(= 不善法의 뿌리)은, 팔사도(= 不善法)의 뿌리.
유전문으로 가는 길이, 팔사도(올바르지 않은 작의→ 邪見 → 邪念으로...) 이라면 환멸문의 길이 팔정도(올바른 작의→ 正見 → 正念...) 으로 가자는 것.
올바른 작의이며, 작의 자체를 잘 하는 것이 '탐진치'를 사라지게 하는 길이라는 것으로, 올바른 작의를 통하여 어느 정도 '탐진치'가 사라지면 그 때에 비로써 겨자씨 만한 정견(正見)이 생겨나 팔정도를 닦아 볼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정견(正見)의 스펙트럼 만큼 광대한 것도 없는데 그 스펙트럼의 중간에 견성취(見成就)가 언급되고 그 견성취에 이어져 사성제에 대한 지(智)가 얻어지고, 불교 최고수준의 반야 인 慧解脫(반야로 해탈) 하는 것.
1. 먼저 (제대로) 알고 보자 ('法性'에 대한 智見)
- 모든 것이 심의 대경인 ‘법으로 보고, 법 임을 보고, 그 법의 성품(法性)이 연기 임을 보고, 그 법들이 모두 '고집멸도' 임을 보는 것
2. 견성취 (= 법에 대하여 위딱카 하고 위짜라 만 남음)
- (전오근, 전오경, 공무변처, 식무변처, 이 世間과 저 世間, 기타 意로 고찰한 것들)을 作意하지 않음. 그러나 바른 作意 만 있는 삼매.
3. 법에 대한 心一境性 : 慧解脫
- 반야로써 法을 자신과 분리하여 보는 것(= 위빠사나)
4. 有尋有伺의 三昧 = 初禪 → 사성제(四聖諦) 깨달아 앎.
사성제와 12연기(유전문과 환멸문 포함)와 팔사도와 팔정도는 한 덩어리의 교설로써 그것들을 분리하여 이해하면 오리무중이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12연기의 유전문 → 사도라고 부르는 方途 → 고의 집(集).
12연기의 환멸문 → 정도라고 부르는 方途 → 고의 멸(滅).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名(受想思觸 作意)이란 하나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한다."
[Nāmasuttaṃ 1:61(7-1) 名의 경]
세간(世間)에서 ‘쾌(快)와 불쾌(不快)’라고 부르는 것, 그것을 의지하여 욕(欲, chanda)이 일어나고, 色들에서 ‘vi-bhava(非有, 비존재)와 bhava(有, 존재)’를 보고서 중생들은 세간에서 분별을 하게 된다....
촉(觸)을 원인으로 하는 ‘쾌(快)와 불쾌(不快)’, 촉(觸)이 없을 때 이것들은 없다. ‘vi-bhava(非有, 비존재)와 bhava(有, 존재)’라는 것도 바로 여기로부터 인연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Sutta Nipāta pp.169~170]
인간의 정신작용에서 선두에 쾌(快)와 불쾌(不快)’ 것이 느낌(受)이다. 이로부터 쾌(快)와 불쾌(不快)에 지배되어 현실이라는 3차원 공간에 '나' 라는 self 가 시작되고...
만일 지금 삶에서 뭔가 불편함, 찜찜하고 불안정 함, 자명하지 못함(= 苦)을 경험 한다면 이것이 이 삶의 차원이 주는 쎈서(알람) 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근원을 찿아 들어가기 시작하는 시도가 불교공부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