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5. 금. 밤새 뒤척였다. 오늘 우리는오전에계획대로 마치고 공항에 출발 2시간 전에 도착하여야 한다. 다행히 오늘 갈 장소들이 가까이에 모여있는것 같다. 남편과 나는 공항 검색대에 걸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서로의 캐리어를 검사하였다. 어제 주문한 탈모비누, 장미화장품은 오후에공항 가는버스에서 받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에 싣기로 하였다. 화장품이 액체이므로 단단히 주의를 준다.
우리가 묵었던, 여러 사항이 참 좋았던 호텔에아쉬움을 두고 나섰다. 오후엔 비행기 안에서 또 몸을 구겨야 하므로 최대한 편하게 입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갔다. 어제보스포러스해협에서 유람선을 타고 멀리에서도호화롭게 보이던 하얀 건물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바로 그 건물이 이 궁전이란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규모는 엄청 크고 화려했다. 여기 들어간 재정도엄청나겠지 싶었다. 그 당시 나라의 살림살이가 거덜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금액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1856년에 완공되었는데 50만 금화(현재 5억 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들어갔다고 한다. 3층의대칭구조이며 285개의 방과 43개의홀, 꽃병,샹들리에, 크리스털촛대, 대형 카펫들은엄청난 재정을 쏟아부었을 것 같다. 그 당시 급속도로악화되던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만회하고자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초호화궁전을 지었으니 막대한 건축비는 황실 재정을 더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다고 하니 가히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너무나 많은 관람객들로 인하여 줄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궁전내부를 돌아볼 땐 가만있어도 저절로 밀려서 앞으로 나아갈 정도였다. 방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크기와 색조, 짜임새가 놀라웠다. 그 당시에 기계는 있었을까? 싶었다. 그랜드바자르 갔을때 유명하다는 튀르키예 카펫이 많이 나와 있었지만 오히려 지금보다 그 당시가 더 크고 화려한 것 같았다. 의자, 식탁, 벽걸이 시계, 침대 등을비롯하여 건물의 기초인 기둥들까지도 어찌 그리 화려할까? 금, 은 기타 여러 가지 이세상에 존재하는 보물을 다모아서 만든것 같은 장신구들은 잠시나마 경주 국립박물관에 보관된여러 유물과 비교가 되었다. 건물 전체도 어마어마했지만 바깥으로 나와서 보니 바로 앞에 바다가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다시 우리는 이스탄불의 상징이라고 하는 성소피아성당(박물관)으로 향했다. 외관은 이스탄불의 다른 모스크와 비슷해 보였으나특히, 마주 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비슷하였다. 현재 성소피아박물관이라는 정식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최초는 성당이었다. 로마 성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자랑한성소피아 성당이다.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이라고 한다. 중앙에 들어서니 개인적인 생각으로 약간은이슬람교 분위기가 나고 또한기독교의 분위가 함께나는곳이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내가 다니는 지금 현재의 우리 동네 성당의 모습을 머릿속으로그려보며 할 말을 잊었다. 시간을 초월하여 약간은 소실되었으나 그 당시의 성당 모습을 추측할 수 있도록 건축된 성당의 규모, 내부 천장과 벽에 그려져 있는 성화와 성모마리아상 등은 경건한 마음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블루모스크는 우리가 보고 온 맞은편의 성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회교 사원이다.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보이면 안 된다고 하여 우리는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신발을 비닐 주머니에 넣고 들어갔다. 건물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모스크라고 불린다.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들은 스테인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벌써 내부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분위기에 압도된 우리는 내부를 둘러보고 성급히 나왔다. 건물이 보존이 잘 되어 새 건물 같았고 거기서 정해진 시간에 현재, 아직도 예배를 본다고 하였다.
히포드럼으로 걸어갔다. 로마 황제 세비루스에 의해 지어진 검투장인데 4세기 무렵에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경기는 금지되고 마차경기장으로 바뀌었다. 경마장뿐만 아니라 왕위계승을 놓고 벌어진 전쟁터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13세기에 십자군과 비잔틴군의 접전으로 경기장 내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고 현재는 다른 시설물들이 들어서 조금은 좁았다. 우리가 보았던 그 유명한 [십계] 영화의 한 장면 촬영장소이기도 하단다. 오벨리스크는 기원전1550년에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파라오에게 헌사한 사원에 세워졌던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왕족들의 일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 아폴로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엉켜 금그릇을 받치고 있는 서펜타인의 기둥이 서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낭만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 피에르로티 언덕으로 갔다. 차에서 내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가는 도중에 내려다보니 숲이 우거져있는 아래에 무덤들이 꽉 차 있고, 멀리 이스탄불 시내와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피에르로티 언덕은 프랑스 장교이며 작가인 피에르로티가 이스탄불에서 복무하는 동안 아지야데라는 튀르키예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프랑스로 돌아간 로티가 연인을 못 잊어 10년 후 다시 이스탄불에 돌아오니 그녀는 벌써 세상을 떠난 후라고 한다. 그 후, 그는 이 언덕에 와서 경치를 보며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의 잦은 발걸음으로 이곳은 그의 이름을 따서 피에르로티 언덕이라고 한다. 그 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아지야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올라가니 찻집에서 아주 진한 향을 내뿜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아주 작은 잔에다 담아서 대접해 주었다.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며 사진을 찍고 우리는 일어섰다.
공항으로 오는 도중에 식당에 들러 현지식 점심 닭 케밥을 먹었다. 이제 집에 가면 튀르키예의 음식들이 생각나겠지 싶어서 나름대로는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였다. 맞은편에 앉은 남편은 집에서는 말도 못 할 정도로 까다로운 입맛인데 잘 먹었다. 나보고 잘 안 먹는다고 잔소리를 하지만 안 넘어갔다. 역시 수프만 후루룩 먹고는 후식으로 나온 멜론을 먹었다. 그래도 배가 부르다. 현지 시각으로 5시 40분 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2시간 전에 도착하여야 하는 우리는 서둘렀다. 차 안에서 넘겨받은 탈모비누와 장미화장품을 받아 향을 맡아보니 특유의 향기가 났으나 싫지는 않았다. 과연 효과가 얼마가 있으려나 우리 부부는 그냥 기념으로 사는 게지하고 기대는 하지 말자 하며 웃었다.
이스탄불 공항에 내려서 캐리어를 다시 꾸렸다. 둘 다 성격이 까칠하고 예민하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을 용납 못한다. 또 누구에게 싫은 소리를 거의 안 하는 편이다. 발권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다시 딸내미가 생각나서 00 귀걸이를 하나 샀다. 내 것은 안 사고 자꾸 자식, 남편 것을 챙기고 싶다. 전 세계 엄마들 마음이 다 같으리라. 자신보다는 가족들을 더 챙긴다는 사실을.
전국 각지에서 모여 구성된 이번 여행의 우 리팀은 모두 다 안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마친 것 같다. 그야말로 전문성을 가진 우리팀 가이드의 역할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짧은 나의 다리였지만 창가에 위치한 나의 자리에서 다리를 구겨 앉으며 9시간이나 걸리는 시간을 잠으로 보내자는 생각을 하고 눈을 감았다.